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Feb 08. 2023

목욕탕에서 마주한 인간의 모든 것

진실을 꿰뚫는 눈

목욕할 때에 생겨나는 비누 거품과 땀과 때, 그리고 기름기가 있는 물을 보면 너는 역겨워 하지만 인생의 모든 부분과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p.158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어본 지가 언제인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목욕탕은 대중의 루틴이고 문화였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엄마에게 손목을 붙잡혀 끌려가서는 억척스럽게 때를 밀리곤 했는데 얼얼한 몸으로 문밖을 나올 때는 열 손가락이 건포도처럼 쪼글쪼글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동네 친구들과 자주 갔다. 냉탕을 더 좋아할 나이였지만 나는 그때에도 추운 건 질색이라 주로 온탕에 자리 잡고 앉았다. 뜨끈한 탕에 푹 담갔다가 나온 등에 이태리타월을 끼운 손을 살짝만 문질러도 국수 같은 때가 끊임없이 생산됐다. 친구와 서로 번갈아 등을 밀어주며 ‘네 등이 넓어서 내가 더 손해’라는 둥 실없는 농담을 해가며.      


대학에 다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찜질방이 유행처럼 번졌다. 단돈 만 원이면 몸을 지지며 피로를 풀었다. 술을 먹다가 차가 끊기면 택시비를 아끼려고 찜질방부터 찾았다. 삶은 달걀과 얼음 식혜도 빠질 수 없다. 그렇게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연인들은 찜질방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욕조가 흔해지고 따뜻하고 쾌적한 화장실이 각 가정에 보급되면서 목욕은 보다 개인적이고 은밀한 활동이 되었다. 남의 때를 볼 일이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청결한 사람이라도 목욕을 하면 찌꺼기가 나온다. 비누 거품 사이로 머리카락과 엉겨 붙은 때는 내 몸에서 나온 것이지만 불결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하게 된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침한다. 네 인생의 모든 부분이라고. 주목할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이라고 명했다는 점.     


‘비누 거품과 땀과 때, 그리고 기름기가 있는 물’을 생성의 순서대로 펼쳐보자면 땀이 먼저다. 땀은 노동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제 밥벌이를 하고 살려면 육체든 정신이든 누구나 노동을 한다. 생산의 대가이다. 새들도 제 힘 들여 집을 짓고 먹이를 구한다. 노동은 신성하거나 위대한 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천박하거나 하찮은 것도 아니다. 단지 모든 생명의 생존 유지 활동이다. 땀은 흘러내리거나 증발하지만 ‘때’라는 다른 형식으로 일부 살아남기도 한다.      


때란 무엇인가. 몸에서 탈락하는 각질과 피지, 외부로부터 붙어온 먼지 등이 땀과 반죽된 물질이다. 때 역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모든 유기체는 세포의 생성과 탈락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나무는 오래된 잎을 떨구고 새잎을 올린다. 사람은 시시때때로 보이지 않는 때를 떨어뜨리거나 작정하고 밀어버린다. 밀려 나온 때는 과거의 나다. 끊임없이 나를 잃고 새로운 나를 얻는다.     


땀과 때를 씻어내는 비누 거품은 허위다. 땀과 때를 더럽다 여기고 향으로 씻어내는 유기체는 인간뿐이다. 동물의 냄새를 제거하고 인공의 향기로 현혹한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비싼 차를 타면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 것처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향기로운 비누 거품으로 샤워하고 나온 직후 깨끗한 모습이 본래의 나이고, 영원할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거품은 결국 사그라들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기름기가 있는 물은 땀과 때를 비누 거품으로 씻어냈을 때 떠오른다. 아무리 감추려고 애써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긴다. 진실과 허위가 뒤범벅되는 것이 목욕 아닐까. 기름기가 뜬 물은 일부러 자세히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진리처럼.     


정말 그렇다. 마르쿠스는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땀, 때, 비누 거품, 기름기가 있는 물로 요약했다.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자연을 거부하고 허위로 얼룩진 인간사를 비판한다. 마치 개안수술을 마치고 얼굴에서 붕대를 벗겨내듯 독자를 진실과 직면하게 한다.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재주는 누구나 훈련하면 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찰하는 일은 보다 고차원적인 능력이다. 그 능력은 부지런한 사유에서 온다. 숨 쉬듯 책을 읽고 밥 먹듯 글을 쓰며 마땅히 당연한 것들에 의심을 품어야 한다. 본질을 헤아리는 눈을 키우면 사는 일이 단순 명쾌하고 한결 가벼워진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글을 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목욕탕을 간 날을 돌이켜보니 설인지 추석인지 모를 재작년 명절 때였다. 시어머니를 제외한 시댁 식구와 함께였다. 구순을 앞둔 시할머니(작은 소리도 들을 만큼 정정하셨다)도 동행했다. 전을 부치느라 피곤했을 며느리에게 피로를 풀고 오라며 뒷정리를 맡은 시어머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목욕탕에 들어가자마자 또래인 시누와는 나는 암묵적으로 서로의 알몸을 감추며 멀찍이 떨어졌다. 각자 몸을 불리고 때를 밀기 시작했다.

     

명절에 한두 번 보는 어색한 시할머니와 다 큰(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나이 든) 내가 나란히 앉아서 때를 미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이상한 용기가 불쑥 올라와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세요. 제가 등 밀어드릴게요.”     


할머니는 연거푸 괜찮다 말리셨는데 어느새 새하얗고 작은 등이 내 눈앞에 놓였다. 나는 엄마와 목욕탕을 갔던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나기도 하고, 조금은 신이 나서 야무지게 할머니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까칠한 핑크빛 타월을 끼운 손으로 어깨까지 힘을 줘서 빡빡 문질렀다.


이럴 수가. 때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뽀얗고 작은 등에서는 유기체의 흔적이 서서히 소멸하고 있던 걸까. 할머니는 그 후로 일 년쯤 더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목욕할 때에 생겨나는 비누 거품과 땀과 때, 그리고 기름기가 있는 물을 보면 너는 역겨워 하지만 인생의 모든 부분과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