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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Mar 01. 2023

당신의 컵에는 물이 얼마나 있나요?

음, 내 컵은...

“네 컵은 반이 빈 거니, 반이 찬 거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난 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소년이 말했습니다.


- 찰리 맥커시 글 그림, 이진경 옮김,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상상의 힘


어느 날, 한 글벗이 자신의 ‘인생 책’이라며 택배로 선물을 보냈다. 취향을 타는 책 선물을 머뭇거리는 나와는 달리 일단 보내고 보는 그의 행동력이 멋져 보였다. 자신이 감명받은 책을 더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그 애틋함 또한 알기에 기쁘게 책장을 열었다.      


제법 두께가 있고 긴 제목의 그림책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 책 제목을 외우지 못해 검색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동물 삽화와 함께 짤막한 대화가 이어지는 구성이 마치 ‘어린 왕자’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글과 그림을 지은 찰리 맥커시(Charlie Mackesy)는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표지 디자인을 하는 등 영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한다. 크로키하듯 흘린 그림체가 멋스럽고 묘한 매력이 있다. 알고 보니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책이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속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짤막짤막했지만 깊은 울림을 줬다. 용기와 우정, 친절함을 말하는 장면은 자못 철학적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친절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따뜻하게 와닿았다. 나에게 책을 선물한 그이는 항상 자신보다는 남의 기분을 먼저 배려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 특히 와닿았던 문장은 따로 있었다.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깨뜨리는 두더지와 소년의 대화였다.


“네 컵은 반이 빈 거니, 반이 찬 거니?”  

“난 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나에게 누군가 “네 컵은 반이 빈 거니, 반이 찬 거니?”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내가 방금 반을 마셨으니 반이 빈 거지!”라고 애써 나름의 논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소년의 대답을 읽고 깜짝 놀랐다.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는 나의 강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키는 일을 하는 게 편하고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익숙하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에 가야 한다. 만약 대학에 가지 않으려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정말 그런가? 또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만으로도 충분할 순 없을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는 일은 수월하긴 하지만 붕어빵틀에서 나온 붕어빵들처럼 무 개성하다. 개인은 사라지고 복제인간만 늘어난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읽기 좋고 아름답게 문장을 가꾸는 것만은 아니다. 선택지의 벽을 허물고 무한대로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정관념과 편견을 양산하고, 알고 있는 것을 세뇌하듯 반복 재생하는 글은 지겹다. 나도 모르게 스쳐 지나간 더 좋은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글을 쓰고 싶다. 


그나저나 소년은 도대체 어떠한 인생을 살았기에 ‘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라는 대답을 했을까. 혹시 인생 2회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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