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이름과 ‘나’라는 이름을 나란히 놓고, 아무리 둘의 균형을 잘 유지하려 해도, 결국엔 ‘부모’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어쩌면 이 둘의 균형점이란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상태를 일컫는 것 같다는 생각. 앞으로의 내 삶은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 김성광,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
누군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출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를 낳고 난 이후의 내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00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나를 ‘00의 엄마’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부모’라는 이름이 ‘나’라는 이름을 앞설 때가 많다.
나를 찾아온 의뢰인이 내게 아이가 있음을 상기시켜 줄 때도 있다. ‘변호사님도 아이 키워보셔서 아시죠?’라면서. ‘나’라는 이름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할 때도 ‘부모’임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부모’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과 책임감 또한 내가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새롭게 주어진 ‘엄마’라는 이름과 역할은 내 삶의 방향을 이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부모’라는 이름과 ‘나’라는 이름 앞에서 흔들릴 때가 많다. 얼마 전, 한 기관으로부터 강의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원하던 기관의 요청이라 무척이나 반가웠고 욕심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강의 날짜가 아이의 유치원 첫 등원 날짜와 겹쳤다. 시간을 조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선뜻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의 첫 등원에 함께 해야 한다, 엄마 없이 낯선 장소와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일하고 싶다. 짧은 시간, 내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부유했다.
갈등했지만 결정의 방향은 이번에도 역시 아이를 향해 기울어졌다. 그러고는 갈등 없이 태연하게 아이를 먼저 선택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일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 삶이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상태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의연해졌으면 한다. 비록 당장은 어느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보일지라도 결국엔 균형을 유지하는 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