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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Nov 02. 2023

하루 5분 필사가 내게 가져다준 것

에너지를 충전하는 최소한의 루틴


연도 별로 묶어놓은 필사 노트 바인더를 보고 있으면, 쑥쑥 커가는 조카를 보듯 뿌듯하다. 매일 필사를 한 지 어느덧 4년 차. 하루에 한 단락씩 책에서 읽은 글귀를 노트에 베껴 쓰고 사진을 찍어 SNS에도 차곡차곡 쌓고 있다. 나의 #필사스타그램에 현재 1,400개가 넘는 글귀가 올려졌다. 그저 하루에 5분이라는 시간을 냈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글쓰기 강의를 할 때도 필사의 다양한 이점을 들어 수강생들에게 권하곤 했는데, 굳은 결의로 시작한 필사를 보름 정도 유지하는 이들은 자주 보았지만 3개월 이상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재미있어야 꾸준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필사는 확실히 재미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재미를 알았으면 좋겠다. 필사는 독서를 충만하게 만든다. 책 속에서 좋은 문장을 찾으려는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냥 책을 읽는 것과 오늘 밤 필사할 구절을 살피며 읽는 것은 다르다. 책을 좀 더 꼼꼼히 살피게 되고 때로는 멈추어서 곰곰이 사유하게 만들었다. ‘이 구절은 왜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올까’를 고민하면서 저자와 나 사이의 간격을 촘촘하게 바느질했다. 그러니까 필사는 단순히 글을 베껴 쓰는 행위가 아니라 독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종이 위의 산책은 5분이 적당하다. 매일 하려면 부담스럽지 않아야 하니까. 하루에 30분씩 필사를 하겠다고 하면 일주일도 버겁게 느껴지겠지만 5분은 ‘바빠서’라는 핑계를 대기도 멋쩍은 시간이다. 한 단락 정도 필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내 하루에서 따로 빼 두는 것이 시작이다.     


장비를 잘 갖추면 필사가 더 즐겁다. 나는 마음에 쏙 드는 필감을 찾을 때까지 여러 가지 필기구를 사용해 보며 노트와 만년필의 궁합을 찾았다. 노트를 펼치면 매끄럽고 질이 좋은 하얀 종이가 나를 환하게 맞이한다.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눈처럼 보기만 해도 설렌다. 그 위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는 만년필의 발자국. 나는 밤마다 종이 위를 사뿐히 산책한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은 흔치 않은 만큼 소중하다.     


공간도 중요하다. 매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를 정해두면 고민할 필요가 없이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전에는 거실 바닥에 누워서 필사했는데, 얼마 전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면서 필사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침실 옆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다. 오직 필사를 위해 기획한 장소다.      


우리 부부의 자기 전 루틴은 이렇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이 침실 옆 베란다로 들어가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는다. 바 테이블 앞에는 창문이 활짝 열려있다. 선선한 밤공기가 불어온다. 왼쪽에 놓인 간이 책꽂이에서 각자 필사할 책과 노트, 펜을 꺼낸다. 나는 만년필, 남편은 볼펜을 쓴다. 둘은 말없이 책에 표시해 둔 문장을 필사 노트에 끼적인다. 낮에 책을 읽지 못했다면 이 시간에 잠깐 짬을 내어 독서를 한다. 필사하려면 어쨌든 책을 읽어야 하니까. 필사한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필사스타그램 계정에도 올린다. ‘내가 필사한 문장에 사람들이 공감해 줄까.’ 궁금해하며 잠자리에 든다.     


필사를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사고의 영역이 넓어진다. 확고하게 믿었던 신념이 무너지는 날도 있다. 손으로 느리게 읽었을 때만 얻는 효과 아닐까. 읽어도 남는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읽는 속도에 집착한다. 빨리 이 책을 해치우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려는 조급함이다. 필사를 하면 저절로 속도가 조절된다. 깊이 읽기는 어쩌면 느리게 읽기와 같은 뜻일지도 모르겠다.     


어휘력과 다양한 문장구조를 익히는 등 글쓰기에도 도움이 되지만, 내가 필사를 지속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혹부리영감에게 노래 주머니가 있다면 나에게는 가슴속에 불안 주머니가 달린 것 같다. 예민한 신경 탓일까, 부실한 건강 상태 때문일까. 나는 이유도 없이 매일 불안했다. 사소한 일이라도 얼른 해결되지 않으면 양말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나의 불안을 해결하려고 주변 사람들을 재촉하거나 괴롭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매일 비슷한 일상이 계속되면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종일 늘어져 시간을 보낸 날에는 소중한 하루를 낭비했다며 자책도 했다. 그럴 때는 ‘내가 건강했으면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을 텐데.’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감자 싹처럼 돋아났다.     


필사를 하면서 나는 많이 차분해졌다. 익숙한 키보드를 쓰다가 주의를 들여 손 글씨로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급하게 썼다가는 철자를 틀려서 다시 써야 하는 일도 생긴다. 촉이 민감한 만년필이라 획을 그을 때 손에 주는 힘이나 속도도 일정하게 신경 써야 했다. 안 그러면 번지거나 글씨 모양이 어그러지니까. 5분 동안 책과 노트로 시선을 왕복하며 틀리지 않게 글귀를 옮겨 쓰는 일은 천천히 이루어졌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잠시 멈춤. 숨 가쁘게 달리던 오늘, 불안하고 조급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침형 인간은 모닝 필사로 하루를 열 테지만 올빼미인 나는 필사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하자 하루를 돌아보며 느끼는 아쉬움이나 자책이 가라앉았다. 내가 비록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종일 누워있었지만 그래도 필사 하나만큼은 해냈구나. 그래, ‘해냈구나’라는 말이 적합하다. 작은 성취가 주는 안도가 나를 좀 더 느긋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작년까지는 그야말로 365일, 여행지에서도,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노트를 챙겨가서 필사를 했다. 혹시나 필사를 거르면 좋은 습관이 끊어질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졸음이 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가끔 거르기도 한다. 필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3년, 아니 30년 후에도 나는 매일 밤 필사를 하고 있을까? 주름진 미간에 힘을 주며 만년필을 끼적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꽤 멋질 것 같은데.



*2년 전, 나의 필사 습관을 눈여겨본 한 출판사가 필사 책을 내보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리하여 며칠 전 세상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 바로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이다. 이 책을 읽고 더 많은 사람이 필사의 즐거움과 효용을 느꼈으면 좋겠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 인생을 바꾸는 법!


저는 아토피, 허리디스크, 기능성소화장애, 편두통,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지만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내 인생은 짱짱합니다. '긍정의 기운'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거진 구독하시고, 매주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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