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식단의 기준은 누가 정할까
TV 채널을 넘기는데 건강 다큐멘터리의 타이틀 <채식주의 VS 육식주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뭐 이런 하나마나한 대결을 하지? 당연히 채식이 몸에 좋은 것 아닌가.’ 나는 의아해하며 리모컨을 멈추고 방송을 지켜보았다. 건강을 위해 육식주의를 한다는 사람들의 식단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달걀 스크램블에 양의 뇌를 넣어서 함께 볶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의 커다란 생간을 일일이 칼로 잘라 소분해 얼린 후 디저트처럼 꺼내 먹었다. 회사에서도 자신의 식단을 유지하고자 매일 새벽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그 내용물은 손수 만든 소고기 육포와 치즈였다.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할 정성이었다.
또 하나 독특한 점은 그들의 식단에 한국인의 힘, ‘밥’이 빠져있었다. 그들은 탄수화물과 채소를 거의 먹지 않고 육류와 생선의 좋은 지방 위주로 식단을 바꿨더니 고혈압과 당뇨가 나아졌고 평생 앓던 변비가 사라졌으며 무기력증에서 해방되어 매일매일 힘이 넘친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자극적으로 편집한 방송이라도 아예 거짓 사연을 내보내지는 않을 터. 전직 방송작가였던 나는 그것이 과장일지언정 거짓은 아니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일명 ‘구미호 식단’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있었다. 그곳에 가입하여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나 역시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니 일부 도움을 받을 만한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 커뮤니티에는 나처럼 이곳저곳 몸이 성치 않으나 현대의학 치료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식단의 골자는 아득하게 먼 옛날, 인류가 수렵과 채집을 하며 먹고살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연히 패스트푸드나 초콜릿, 과자와 같은 최근에 생긴 가공식품은 먹으면 안 된다. 농업으로 생산한 곡물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호모사피엔스가 살아온 7만 년에 비하면 농경 생활을 한 약 1만 년은 상대적으로 긴 세월이 아니다. 지금은 밥이나 빵을 당연한 주식으로 여기지만, 인간이 한 곳에 정착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부터 쌀이나 밀가루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수렵·채집 사회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본다면 지금의 쌀과 밀가루 역시 몸에 해로운 가공식품으로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농업혁명 전에 인간은 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았다. 동물을 잡지 못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수일을 굶어야 했고, 운 좋게 덩치 큰 매머드라도 잡는 날이면 언제 다시 올 기회일지 모르니 배가 터지도록 먹었을 것이다.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좋다 하는 이유도 어쩌면 수렵·채집인의 시계가 몸속에 남아있어서 아닐까. 365일, 밤이고 낮이고 음식이 넘쳐나는 지금은 식사를 배불리 하고도 습관처럼 과자, 사탕, 젤리, 과일 주스를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언제든 손만 뻗으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은 편리하긴 하지만 과연 건강에 이로울지 의문스럽다.
다시 돌아가, 동물을 사냥했을 때 영양이 가장 많은 부분을 먼저 먹을 텐데 그 부분이 내장이며 그중에서도 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소간에는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질 등 영양소가 풍부하고 중량 대비 풍부하다. 구미호가 인간의 간을 먹는 이야기나, 용왕님이 거북에게 토끼 간을 가져오라고 시킨 구전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지 않을까. 점점 그들의 논리에 설득되어 갔다.
그들은 진지했고 학구적이었다. 자신들이 먹는 소의 간이나 동물 내장에는 어떤 영양소가 들어있고, 어떻게 조리했을 때 더 효과적으로 영양을 얻을 수 있는지 학술자료를 분석해 가며 정보와 지식을 공유했다. 나는 게시글들과 식단 후기들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평생 ‘고기는 나쁘고, 채소는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았기 때문에 온전히 믿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직접 먹어보면 된다.
건강한 육식을 하려면 살을 찌우기 위해 가둬놓고 GMO곡물 사료를 먹이는 소가 아닌,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자란 자연 방목 소고기를 구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판매하는 곳이 거의 없었고 값 또한 굉장히 비쌌다. 검색 끝에 냉동 수입 원육을 판매하는 곳을 발견해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내 팔뚝보다 굵은 원육을 정성 들여 손질하여 매일 아침, 밥 대신 손바닥만 한 목초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런데 마블링이 가득해 입에서 사르르 녹는 한우와는 맛이 전혀 달랐다. 누린내가 심하고 고무를 씹는 것처럼 육질이 질겨서 먹기가 고역이었다. ‘소고기가 맛있는 이유는 지방 때문이었구나’를 제대로 느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최적의 굽기 정도를 알아내고 소금을 많이 쳐서 먹으니 그나마 먹을 만했다.
매일 먹는 식단에 천연 버터(건강한 지방)를 추가했고 그동안 아삭한 식감에 즐겨 먹던 샐러드도 끊었다. 콩과 시금치처럼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채소들도 모두 먹지 않기 시작했다. 마치 엄마 말을 안 듣는 청개구리가 된 것처럼, 나는 상식과 정반대의 식단을 지속했다. 기분 탓일까, 예전보다 소화가 잘되었고 늘 무기력하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육식주의 식단은 나와 꽤 잘 맞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일부러 육회 집에 찾아갔다. 용기를 내 태어나 처음으로 소간을 시켜보았다. 곱창을 먹을 때 시뻘건 소간이 나오면 징그럽다고 친구에게 떠넘겼던 나였다. 비릿한 냄새가 거슬렸지만 참기름을 듬뿍 찍어서 먹으니 먹을 만했다. 구하기 힘든 싱싱한 소간이니 기회가 왔을 때 양껏 먹어놓자 싶어 한 접시를 다 비웠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화장실과 한 몸이 되어 식은땀을 흘렸고 며칠을 앓았다.
간을 먹고 탈이 난 뒤 이 식단의 지속 가능성에 의심이 들었다. 이것이 독소 배출 현상인지, 아니면 그냥 내 몸에 안 맞는다는 뜻인지 모를 일이었다. 맹목적인 믿음으로 먹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이런 딜레마는 자연스레 해결됐는데, 다름 아닌 경제적인 문제였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고깃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수입 목초육을 꾸준히 먹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결국 6개월 정도 지속했던 엄격한 육식주의 식단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식단 공부를 하면서 생긴 지식을 지속 가능한 범위에서 지켜가고 있다. 예를 들어, 마블링이 가득한 한우를 애써 먹지 않으려 하고 기왕이면 닭고기도 자연 방목한 것을 구매한다. GMO 곡물 사료를 먹이지 않은 육류를 쉽게 공급받고자 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비린내가 난다며 입에도 대지 않던 생선구이를 즐겨 먹고 고춧가루와 마늘, 파를 습관처럼 쓰지 않는다. 콩이 들어가지 않은 어간장을 사용해서 간을 맞춘다. 이 정도는 내가 평생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고기를 먹는 것이 일종의 치팅이었다면, 지금은 채식이 나에게 치팅이 되었다. 사실, 나는 꼭 건강 때문이 아니라 맛있어서 채소를 좋아했다. 봄 내음 나는 냉이와 두릅, 향긋한 미나리, 들기름에 무친 고소하고 쌉쌀한 유채 나물, 삼겹살에 싸 먹는 깻잎을 어찌 포기한단 말인가. 음식은 건강을 위해서만 먹는 것은 아니니까. 요즘은 옥상 텃밭에서 기른 바질 잎을 뜯어와 버터를 듬뿍 바른 사워도우에 얹어 먹는다.
‘채식이 몸에 좋고 육식은 나쁘다’가 세계적인 주류 의견이다. 비건주의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깨인 사람들’의 식단이란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식품 대기업들도 이를 놓칠세라 대체육과 비건 식품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고기와 비슷한 식감을 내려고 만든 ‘콩고기’와 동물을 위한다는 ‘비건 우유’에 얼마나 많은 인공 성분의 감미료가 들어가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나는 채식주의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주목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을 지키며 사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금껏 내 의지로 선택한 식단이라고 믿었지만, 알고 보면 언론이나 전통적인 교육, 마케팅에 따라 결정된 것들도 많았다. 나는 나에게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보고 선택하고 식단을 재편성했다.
육식주의라는(동물복지를 전제하지만), 어찌 보면 원시적인 비주류 식단을 내가 지향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볼 것도 안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내 몸에 들어갈 음식은 내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 당뇨 환자에게는 현미가 좋을지 몰라도, 소화력이 약한 사람에게 곡물의 겉껍질은 해가 된다. 겉껍질을 제거하지 않으면 농약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사람마다 외모와 성격이 다른 것처럼 잘 맞는 식단이 다르다고 믿는다. 하물며 자동차도 차종에 따라 경유, 휘발유, 가스, 전기 등 연료가 다르다. 복잡 미묘한 유기체인 인간에게 하나같이 채식이 좋으란 법 없다. 예민한 사람은 그래서 스스로 더 챙겨야 한다.
사실, 무얼 먹어도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식단에 집착하지 않을 테고, 그럴 필요도 없다. 40년 넘게 삼시세끼 라면만 먹고 91세까지 장수한 한 할아버지의 사연을 기사에서 읽었을 때는 내가 애써 지켜내려고 하는 건강 철학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릎에 힘이 빠지기도 했다. 건강을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도 되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솔직히 궁금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