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밥 Nov 09. 2023

집에 옥상이 있어서 좋은 점

오늘의 바상루는 이상무


예전에는 심란한 마음이 들 때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는데, 요즘은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 한 모퉁이 작은 공간이지만 나를 반기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전부터 다시 키우기 시작한 바질, 상추, 루꼴라 삼총사다. 나는 그들을 줄여서 ‘바상루’라고 부른다.      


바질의 독보적인 향과 루꼴라의 고소하고 맵쌀한 맛에 반해 몇 년 전에도 허브를 키운 적이 있다. 아파트 베란다인데도 쑥쑥 잘 자라서 신이 났는데, 얼마 안 가 눈에 거슬리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바질과 루꼴라 주변을 날아다니는 ‘뿌리 파리’라는 해충이었다. 깨알만 한 성체는 보기 싫고 귀찮을 뿐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이 흙 속에 알을 낳는데 애벌레가 나오면 식물의 뿌리를 갉아 영양을 빼앗아간다. 아니나 다를까, 싱싱하던 바질이 성장을 멈추고 루꼴라는 누렇게 떠서 시들기 시작했다.      


옅은 농약을 사다가 물에 희석해서 흙에 뿌려보았다. 에프킬라를 한 통 다 뿌려보기도 했다(이미 무농약 허브는 물 건너간 상황). 최후의 방법으로 흙을 전자레인지에 구워서 분갈이해주기도 했다. 효과는 잠시뿐, 뿌리파리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바질 잎을 모두 따서 바질페스토를 해 먹고는 허브들을 뿌리째 모두 뽑아 버렸다. 습한 실내에서 흔히 생기는 뿌리 파리는 나만 몰랐을 뿐 반려식물을 키우는 이들 사이에서는 악명 높은 녀석이었다.      


올봄 무리해서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자연과 가깝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옥상이 딸린 연립 주택 청약에 당첨되어서 무려 30년 대출을 끼고 입주했다. 내 몸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곳에 투자하는 거니까 괜찮아, 애써 합리화했지만, 막상 이사를 앞두자 매달 빠져나갈 대출금과 이자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새집. ‘괜한 짓을 했나’라는 후회는 한 달 만에 ‘잘했구나’로 바뀌었다.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뻥 뚫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도시에 살면서 사방이 뚫린 공간을 소유하는 게 그토록 기쁜 일인 줄 몰랐다. 글을 쓰다 가도, 몸이 찌뿌둥하거나 가슴이 갑갑할 때도 옥상을 찾았다. 허전한 옥상을 어떻게 꾸미면 좋을까, 둘러보던 중 뿌리 파리 번식으로 키우기에 실패했던 바질과 루꼴라가 떠올랐다. 옥상이라면 통풍이 잘되니 뿌리 파리가 안 생길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모종을 6개씩 주문했는데 인심 좋은 종묘 가게에서 상추 모종 2개까지 딸려 보냈다. 집에 마침 기다란 화분과 분갈이하고 남은 흙이 있길래 바로 모종을 옮겨 심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병아리들처럼 귀여워 보였다. 손가락만 했던 모종은 사흘이 지나자 손바닥만큼 잎이 넓어졌다. 바람이 잘 통하는 야외에서 햇볕을 듬뿍 맞아서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뉴스에서 폭우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나왔다. 나는 옥상의 바상루가 먼저 걱정됐다. 소나기에 흙이 파이고 아직 여린 식물이 빗방울 압력에 꺾이면 어쩌나 싶었다. 그렇다고 집안에 들여놓자니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과 체념으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개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잠옷 바람째 옥상으로 올라갔다. 화분 흙이 온통 파헤쳐지고 이파리가 꺾인 바상루를 상상하며, 너무 충격받지 말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놀랍게도 바상루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초록의 채도는 더 짙어졌고 잎끝에 맺힌 빗방울이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오히려 몸집이 1.5배는 더 커진 듯했고 이파리가 왕성해 보였다. 화분 물받침은 빗물로 가득 찼지만, 신기하게도 흙은 파헤쳐지지 않았다. 나는 며칠 후 그 비밀을 알게 됐다.      


모종을 너무 밭게 심어놓는 바람에 화분이 금방 비좁아졌다. 커다란 화분으로 옮겨 주려고 바질과 루꼴라 몇 뿌리를 꽃삽으로 살살살 주변 흙을 도려내어 떠내려고 했다. 그런데 커다란 흙덩이가 함께 통째로 딸려 올라오는 것 아닌가. 벌써 모종의 뿌리가 넓게 뻗쳐 흙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 덕에 많은 비가 내려도 흙이 파헤쳐지거나 허브가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단단하게 땅을 붙잡고 악착같이 살아내었다.      


그런데 얼굴을 가까이하여 살펴보니 몇몇 잎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 아닌가. 그 사이 벌레라도 생긴 걸까. 나는 잎을 뒤집어도 보고 흙을 뒤적거리며 구멍의 가해자를 색출하려고 애썼다. 쌀알보다 작은 초록색 애벌레가 루꼴라 잎 뒤에 숨어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맙소사. 뿌리 파리를 피해 옥상에 식물을 심었더니 나방이 알을 낳은 것이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 뒤로 시간만 되면 옥상에 올라가 땡볕 아래에 쭈그리고 앉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보이는 족족 핀셋으로 애벌레들을 잡았지만, 잡아도 잡아도 요술처럼 등장하는 애벌레는 수작업으로 감당이 안 되었다. 유기농 채소가 괜히 비싼 게 아니었다. 초보 옥상 농부는 농약 없이 채소를 키우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된 거, 나도 먹고 애벌레도 먹고 같이 나눠 먹자꾸나. 자연에서 자라는 채소를 벌레 없이 키울 생각은 허황된 욕심이었다.      


매일 화창할 수 없다. 때로는 불볕더위에 버티고 따가운 비도 맞아야 한다. 벌레가 파먹어도, 좀 자라려고 하면 이파리를 똑 떼어가는 인간이 있어도 오늘의 ‘바상루’는 꿋꿋이 제 일을 하고 있다. 보드라운 흙을 꼭 붙잡고 있는 힘껏 영양을 끌어올려 잎으로 보낸다. 곧 꽃대가 올라오고 꽃도 피겠지. 바질꽃은 봤는데, 루꼴라는 또 어떤 꽃을 피울지 은근히 기대된다. 주말에는 옥상에서 고기를 굽고 내가 키운 보드라운 상추로 쌈을 싸서 먹어야지.     


나는 옥상에 올라가기 전에 주위에 마치 여러 사람이 있는 것처럼 큰 소리로 “바상루 보러 갈 사람~!”하고 외친다. 그러면 쿵짝이 잘 맞는 반쪽이 “저요, 저요!”하며 나를 따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간다. 오늘은 또 얼마나 자랐는지 들여다보며 시든 잎을 따주고 향도 맡아본다. 엄마가 나와 남동생을 출가시킨 후 좁디좁은 집안에 왜 자꾸 식물을 들여놓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새로운 식구와 새집에서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고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 인생을 바꾸는 법!


저는 아토피, 허리디스크, 기능성소화장애, 편두통,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지만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내 인생은 짱짱합니다. '긍정의 기운'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거진 구독하시고, 매주 목요일에 만나요.


이전 06화 하루 5분 필사가 내게 가져다준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