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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Nov 12. 2019

선배는 꼭 후배에게 밥을 사야 할까

'관습'이라는 이름의 폭력


나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방송작가라고 하면, ‘우와~’ 한다.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추켜세웠다. 그럴 때면 난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월급 얘기로 찬물을 끼얹곤 했다.


“에이, 한 달에 100만 원 밖에 못 버는 데요 뭘”   

  

막내작가로 일을 시작해 월 100만 원을 벌기까지 1년이 걸렸다. 첫 월급은 80만 원(2007년 기준), 감사하게도(?) 6개월이 지나자 90만 원으로 올려줬다. 흔히 말하는 ‘열정 페이’다. 그렇게 주고 밤낮없이 일을 시켜도 ‘막내작가’를 하겠다는 이들이 줄을 서니 처우는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막내작가는 사실 누구나 될 수 있다. 다만 1년을 못 채우고 방송계를 떠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비슷한 경력의 남들만큼 벌려면 최소 6년은 기를 쓰고 버텨야 한다. 그 이후에는 능력 나름이다. 프로그램을 여럿 하는 체력과 능력을 갖춘 메인작가는 월 천 단위도 번다. 다행히 지금은 막내작가에게 최저시급을 지키는 분위기이다. 방송계의 열악한 환경이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고, 작가들이 수없이 싸워온 덕이다.


막내작가의 시급이 연필 한 자루 값 정도로 처절했던 그 시절, 밥을 사지 않는 선배는 욕을 먹어야 마땅했다. 사실 욕먹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하(地下)인과 반지하인이 얽혀 서로를 물어뜯는 장면 말이다.    

 



“얘들아 밥 먹었니?”


짠돌이로 유명한 PD가 어쩐 일로 막내작가와 조연출들에게 밥 안부를 물었다. 그는 1년이 넘게 밥은커녕 커피 한잔 막내들에게 안 살 정도로 인색했다. 막내뿐만 아니라 동료 PD들 사이에서도 그의 그러한 면이 종종 회자될 정도였다. 밥은 주로 혼자 먹거나 집에서 도시락을 싸왔고, 아니면 걸렀다. 그런 그와 함께 막내작가 셋, 조연출 둘이 함께 분식집으로 향했다. 김치볶음밥과 떡볶이, 순대 등을 골고루 시켜 나눠먹었다. 며칠을 굶은 PD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이십 대 다섯이 모이면 설거지가 따로 필요 없다. 그릇은 순식간에 깨끗이 비워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내 머릿속엔 물음표가 떠나지 않았다. ‘웬일로 밥을 다 산대? 퇴사하나...’ 짠돌이 PD가 문득 짠-하게 느껴지려는 순간,           


“이모 여기 2만 원이죠? 3천 원씩 내면 되겠네.”     


잘못 들었나?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10년 차 선배가 막내들에게 분식집에서 더치페이를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얼어붙었고, 불편함을 죽을 만큼 싫어하는 한 조연출이 나섰다. “피디님, 제가 낼게요.” 그는 황급히 2만 원을 꺼내서 이모님께 건냈다. 월세살이를 하는 그의 월급은 70만 원. 물론 식비 포함이다.           


우리는 그 사건 이후로 짠돌이 PD를 혐오했다.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피디와 막내 피디인 조연출은 랜덤으로 짝을 지어 촬영을 나가야 했는데, 짠돌이 PD가 걸리는 날엔 제작비를 아끼는 바람에 식사를 거르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짠돌이 PD와 불편함을 못 견디는 조연출이 짝이 되었고, 나는 그 피디의 리서처를 맡아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촬영 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출연자가 조기축구를 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촬영이라 짠돌이 PD와 조연출은 모두 공복이었다. 전반전이 끝날 무렵, 조기축구회에서 선수들이 먹으려고 주문해놓은 도시락이 도착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짠돌이 PD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도시락 하나 먹어도 되죠?” 출연자에게 물어보는 그의 손은 이미 바쁘게 포장을 뜯고 있었다. 그는 밥을 우물거리며 조연출에게 말했다. “너도 하나 꺼내 먹어~” 조연출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평소 밥 한 번 안 사는 그가 출연자가 주문한 밥을 자연스럽게 먹는 모습이 얄미웠다. 조연출은 이 꼴 보기 싫은 장면을 나에게 고발(?)하고자 문자를 보냈다.     


짠 PD 지금 출연자 밥 축내는 중ㅎㅎ     


문자를 전송한 조연출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옆에서 신나게 도시락을 먹던 짠돌이 PD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린다.          


“찬우야 이 문자 뭐야?”     


후반전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축구장을 울렸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듯 둘 다 카메라를 들 수 없었다. 문자는 내가 아닌, 문자 속 주인공에게로 이미 넘어갔다. 조연출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하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문자 잘못 보냈네요.”          


조연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짠 PD가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막내들이 나 짠돌이라고 싫어하지?”


조연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알아. 외벌이라 늘 쪼들려. 애 셋에, 집 대출까지 갚으려니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짠 PD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불편함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조연출은 또다시 불편해져야만 했다. 사실 가장으로서 PD의 월급도 빠듯한 건 마찬가지였다. 외주제작사에서 일하는 PD의 경우, 비슷한 연차의 중소기업 회사원의 월급과 비슷하게 받기까지 10년 가까이 걸린다. 밤낮 휴일 없이 일해 봤자 야근수당 하나 없다. 갑자기 본사 사정에 따라 프로그램이라도 없어지면, 일자리도 잃고 퇴직금도 받기 어렵다. 제작사 내부에 다른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나마 갈아탈 기회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영세한 경우가 많아 프로그램 1~2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짠 PD 역시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 10년 넘게 생존한 사람이었다. 박봉을 버티며 여러 제작사를 전전했을 터. 마침내 정착한 곳에선 자기보다 열 살 아래 막내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동료들도 뒤에서 흉을 봤다. 그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짠 PD는 한참 어린 후배에게 돈 얘기하는 게 민망했다. 하지만 그 역시 상황을 모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다음 날, 분식집에서 더치페이를 할 뻔했던 막내들이 모여 배 터지게 '초밥 파티'를 했다. 남의 구내식당 ‘오늘의 백반’만 먹다가 팔딱팔딱한 초밥을 맛보니 머리도 한층 잘 도는 거 같다. 돈은 짠 PD가 냈다. 물론 그는 그 이후로 다시는 밥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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