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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Oct 29. 2019

작가와 PD가 싸우는 사소한 이유

지금은 '발효' 중입니다


발효실에서 두 인간이 보글보글 거품을 일며 발효 중이다. 21시간째 씻지 못한 작가와 48시간째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한 피디. 누가 더 골고루 잘 발효됐을까.     


시사 전날 편집실을 우리는 발효실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작은 방안에는 모니터를 붙잡고 씨름 중인 피디가 앉아있다. 작가는 편집구성안을 화면에 띄운 노트북을 들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피디의 모니터 옆에 널브러진 핫식스 캔 따위의 쓰레기를 대충 치운다. 작가는 노트북을 놓고, 전원을 콘센트에 연결한다. 머리에 뽀마드를 바른 듯 기름이 흘러넘치는 두 사람은 이제 뜨거운 전우이자 철천지 원수가 되는 시간이다. 하루 밤을 함께 새우며(또는 발효되며) 파이널 커팅이란 작업을 한다. 시사에서 최대한 많이 까이지 않도록 영상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피디는 며칠을 공들여 편집한 영상을 작가에게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했던 구성과 내레이션 자리가 충분히 확보돼 있는지 확인한다. 중간에 의문이 생기면 영상을 멈추고 피디에게 묻는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영상을 앞뒤로 붙였다 떼었다 하며, 60분 분량을 45분까지 줄여낸다. 보통 피디와 작가가 싸운다면 파인 작업을 할 때다. 분명 전화 통화나 회의에서 대화했을 땐 같은 생각을 했다고 믿었는데 영상을 보면 동상이몽이 따로 없다.


그날은 더구나 너무 사소한 문제에서 비롯됐다.




“이 실험은 어차피 반복되는 그림인데 그냥 분할화면으로 짧게 가는 게 어때요?”     


방송 분량에 맞추려면 영상 길이를 10분 이상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언가를 줄여야 한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디의 생각은 달랐다.     


“작가님 뜻은 알겠는데, 이거 줄여봤자 얼마 안 돼요. 이건 길게 봐야 의미가 있어요.”     


“얼마 안 돼도 어차피 줄이긴 해야 하잖아요. 저는 이 실험장면 지루한 대요? 내레이션 쓸 말도 딱히 없고요.”


피디 인상이 구겨졌다.     


“별 차이 없다니까요? 이거 분할로 가면 설명이 잘 안돼요.”     


“앞에서 실험 설명 다했고, 충분히 이해될 거 같은데요? 어차피 줄일 거면 당연히 이 부분이죠~”     


갑자기 버럭, 큰 소리를 내는 최피디.     


“제가 편집기사는 아니잖아요!!”     


네? 이건 또 무슨 곡해일까. 그 어조나 문장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는 사춘기 소년의 절규가 떠올랐다.     


“누가 그렇데요? 왠 오바예요 참나”     


나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말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는 최피디. 발효실 안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발효 시간이 넘어가면 식초는 술이 된다. 술이 되기 전에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 게다가 나는 조금 쫄았다. 밀폐된 공간이었다. 그는 덩치도 나보다 컸고 무엇보다 힘이 센 남자였다. 그의 콧김에서 한동안 분노가 느껴졌다. 급기야 그는 손목을 감고 있던 붕대를 푸르기 시작했다. 손목터널 증후군 때문에 얼마 전 깁스를 했다고 들었다.      


‘뭐지, 왜 갑자기 붕대를 푸는 거지? 이렇게 내 작가 생활 끝나는 건가’     


나는 금방 주먹이라도 날아오는 건 아닌지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먹이 날아오면 내 오른쪽 팔꿈치를 올려 막고 얼른 왼손으로 저 문을 열고 탈출해야지. 나는 머릿속으로 탈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했다. 다행히 그는 그냥 붕대를 풀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목을 긁는 거 보니 가려웠나 보다. 휴 살았다.  

   

혼자만의 분노조절 시간을 가진 최피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님, 제가 갑자기 흥분해서... 화내서 죄송해요. 작가님 말대로 분할로 가죠. 이거 이렇게 붙이면 되죠?”     


“아니에요, 제가 너무 제 말만 맞다는 식으로 얘기해서 죄송해요. 근데 저 진짜 피디님을 편집기사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상황은 급전환. 우리는 한 배에 탄 선원이다. 배에서 서로를 밀어 떨어뜨릴 심산이 아니라면 함께 노를 젓는 게 맞다. 무엇보다 시사라는 거센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발효를 마치고, 발효실을 탈출한 두 사람. 시사에서 본사 CP에게 대차게 까이고 3시간 만에 또다시 발효실로 직행하였고, 잘 익은 술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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