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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Nov 12. 2019

보아선 안 될 것을 봐버렸다!

전지적 방송작가 시점


예능과 달리 교양 프로그램 작가는 촬영 현장에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은 섭외, 보도자료, 프리뷰, 다음 아이템 서치 등 사무실 '안'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중 품이 많이 드는 게 ‘프리뷰’라 부르는 촬영 원본 테이프 보기다.


피디가 현장에서 찍어온 영상을  보면서 중요한 내용과 덜 중요한 내용들을 확인한다. 보통 50분 휴먼 다큐라면 60분 촬영 테이프 40권 이상을 봐야 했다. 엄청난 시간이다. 찍어온 피디도 고생했지만, 영상을 모두 봐야 하는 작가도 고되다. 시청자는 40시간의 영상 중 체에 곱게 거른 50분 분량만 보게 된다. 다큐가 아닌 경우에도 최소 방송 분량의 다섯 배 이상은 찍는 듯하다.    

     

그래서 방송작가는 시청자는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소유한다. 아무도 모르는 출연자의 출생 비밀을 나는 알고 있다. 출연자가 녹음되는 걸 모르고 중얼거린 혼잣말을 우연찮게 듣기도 했다. 출연자는 나와 고작 전화 몇 통화한 게 전부라고 믿겠지만, 나는 PD가 녹화해온 테이프를 보면서 그들의 속속들이를 꿰고 있다. 무엇보다 촬영 과정의 '웃픔'을 안다. 그것이 흥미로 울 때도 있지만, 사실은 모르고 싶을 때가 더 많다.         




장수 할아버지가 출연하는 회차였다. 다소 질리는 구성이긴 하지만, 주인공을 소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사다. 예를 들어, 피디가 “할아버지~! 이 마을 장수 할아버지 맞으시죠?” 하고 부르면, 주인공은 어색하게 뒤를 돌며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한다. 그 순간 화면은 정지하고 프로필 자막이 들어간다.     


"내 나이가 어때서~"

김장수(87) / 참이슬로 건강유지     


다른 촬영은 자연스럽게 찍는 편이지만, 첫 장면인 주인공 소개는 보통 이처럼 짜고 찍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초동안 장수 할아버지가 피디(카메라)를 바라보고 “안녕하세요~”하면, 피디가 “우와, 정말 젊어 보이세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질문한다. 할아버지가 “87세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피디는 굉장히 놀란 듯 리액션을 하기로 돼있었다.          


나는 구성안에 썼던 내용들이 잘 찍혔는지 확인하려고 첫 번 째 MP4 파일을 열었다. 마당을 쓸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인상 좋으시네.’ 취재 통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호감형이라 안심한다. 카메라가 주인공에게 다가간다.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화면을 응시하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이어지는 피디의 질문, “정말 젊어 보이세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긴장하신 걸까, 할아버지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나이를 잊어버리신 거 같다.     


“연세요?”

“할아버지 나이를 말씀하셔야죠. NG 다시!”         


“우와 할아버지 연세가?”


“가만 올해 내가 몇이었더라.”

“다시 다시!”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연세가?”


“나 87세요 이렇게 말하면 되나?”

“아이참 할아버지, ‘이렇게 말하면 되나’ 이 말은 빼고요. 다시 다시”         


촬영 원본을 보는 내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드라마 촬영도 아닌데 같은 장면을 수없이 반복시키는 게 너무나 죄송하고 민망했기 때문이다. 잘라서 쓰면 쓸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피디는 한 치의 어색함도 없는 상황을 찍고 싶은 거 같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다. 자연스러운 게 더 낫다. 화면 속에서 목소리만 들리는 피디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질문을 계속해댔다.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연세??”


고장 난 녹음기처럼 같은 장면이  번 넘게 반복됐다. 피디의 눈먼 열정에 나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 제발 그만해..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뜨거운 여름이었다. 할아버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무거운 카메라를 든 피디는 더할 것이다. 하지만 피디만큼 할아버지도 열정적이셨다. 지치지 않고 “안녕하세요”와 “연세가?”가 다투듯 반복됐다. 아무래도 지치는 건 나뿐인 건가.


나는 할아버지가 점점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장면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피디에게 분노가 느껴지려던 그 순간, 나는 웃겨서 빵! 터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피디가 나이를 묻기도 전에 질문을 봉쇄해버렸다.          


“안녕하세요 제 나이는 87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짜증.


“아유 그냥 끊어서 써!
더 이상은 못하겄어!”


할아버지는 프로였다. 피디는 결국 할아버지께 승복하고 말았다.          


하나의 방송이 나오기까지 참 많은 사람의 수고가 들어간다. 출연자의 고생도 빼놓기 힘들다. 카메라 앞에 서본 사람은 안다. 평소 달변가로 정평이 난 사람도 말문이 턱 막혀버린다. 어제까지 외운 대본은 모두 머릿속에서 휘발되어버리고, 내가 잘 아는 분야인데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일반인 출연자는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물론 이해관계가 걸려있을 때도 있다. 방송 출연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인의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어 출연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용기가 필요한 일임은 사실이다.          


현장의 피디를 나무랄 수도 없다. 그는 그의 본업에 충실했을 뿐이다. 피디로서 더 좋은 멘트를 뽑아내야 하고, 어떻게든 출연자를 잘 움직여서 마음속 깊이 담아둔 말까지 튀어나오게 해야 한다. 그것이 연출이고 경륜이다.  


하지만 나이를 말하는 장면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그 피디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87세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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