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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방송국 놈들

마음에 쌓이는 굳은 살


나는 좀 신이 나있었다. 방송작가로서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느꼈던 걸까? 짧은 코너지만 나의 방송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작은 도움이 될 거라는 순진한 마음, 아니 순수한 마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하이에나처럼 인터넷 밀림 속을 떠돌며 아이템을 찾던 중이었다. 그때 나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한 기사!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주방용품 업체에서 몸에 해로운 소재를 사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어린아이가 이 주방용품을 자주 접촉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골자였다. 나는 즉시 메인언니에게 알렸다.         


“언니, 이 아이템 어때요?
유명한 업체인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나와 띠동갑인 메인언니는 내가 전적으로 믿는 사수였다. 다른 제작사 서브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바로는 이렇게 꼼꼼하게 대본 첨삭을 해주는 *아방 메인작가는 잘 없었다. [아방: 보통 오전 7시~9시 사이 아침 생방송을 가리키는 말] 초를 다투는 아침 생방 직전에도 얼굴이 벌게진 채로 밑줄을 쳐가며 팩트 체크를 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문장으로 원고를 고치던 멋진 언니. 게다가 늘 따뜻한 말투로 후배들의 성장을 응원해주셨다. 그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프로 작가’의 모습이었다. 그런 메인언니가 내 의견에 동의하며 고발 아이템 진행을 허락했을 때 난 좀 신이 났다. 제대로 방송에 이 업체를 고발해서 다시는 원가 절감을 이유로 못된 짓을 못하게 하고 싶었다.        


기사를 쓴 기자와 통화를 해 자세한 내용을 취재했고, 문제가 되는 제품의 성분을 조사했다.  대략적인 촬영구성안을 쓰고, 업체 쪽에도 전화를 했다. 업체 입장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업체 쪽은 딱히 밝힐 입장이 없다며 함구하였고 서면으로도 밝히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나는 그대로 구성안에 옮겼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업체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담당 PD는 업체의 프라이팬, 냄비, 조리기구 등을 사러 나갔고 방송 준비는 순조로이 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심각한 통화를 한 참하던 팀장님이 난감한 얼굴로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불량 주방업체 아이템, 엎어야 할 거 같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네? 이거 컨펌받고 촬영도 나갔는데요?" 


나는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메인언니를 바라봤다. 메인언니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팀장님,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본사에서 접으래요?”     


“메인작가님, 그 주방업체 대표가 본사랑 좀 아는 사인가 봐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방송을 접어요?”          


빨갛게 된 나의 얼굴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팀장님과 메인언니는 그런 나를 두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말도 안 돼.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냥 덮고 넘어가자고?’     


믿기 힘들었다. 더럽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나는 처음으로 사회의 더러운 모습을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매주 밤샘을 하며, 일주일에 하루 쉴까 하는 서브작가의 월급은 120만 원. 돈 때문이면 이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다. ‘보람’과 ‘자부심’을 동력으로 일하는 게 방송작가라는 업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메인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불길했다. 불길한 예감은 보통 틀리지 않는다. 난감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는 언니.     


“미안하다, 그 아이템은 못할 거 같아.. 얼른 다른 아이템 찾자”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분노, 아니 그보다는 억울함이 컸다. 그렇게 믿었던 언니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메인언니만큼은 이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메인언니 역시 본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을이었다. 뭔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나의 부푼 다짐은 권력 앞에서 너무 쉽게, 간단히, 가볍게 무너졌다. 본사에 전화라도 해서 따져볼까 3초 정도 고민했지만 겁이 났다. 우리 팀만 괴로워질 게 뻔하다. 일개 서브작가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언니, 이건 진짜 아니지 않아요? 이럴 거면 방송을 왜 해요?”          


언니는 말없이 나의 등을 두드렸다. 배 째라 심정으로 드러눕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내 손은 이미 다른 아이템을 급하게 찾고 있었다. 정의구현이고 나발이고 시간이 없다 시간이.      


‘그래, 이게 뭐 PD수첩이나 소비자고발도 아니고 꼴랑 10분짜리로 무슨 고발을 해. 시청률이나 잘 나오면 그만이지."     


나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정의감’만으로 방송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해관계가 얽힌 수많은 사람들을 통과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곱게 정제된 ‘방송용 내용’만 TV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말할 수도 없다는 걸. 이렇게 하나씩 포기하고 타협해가는 게 아프지만, 방송작가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걸. 가장 두려운 점은 앞으로도 옳다고 믿는 신념과 이상은 수없이 벽에 부딪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또 인정해야 했다. 내가 그 벽과 싸울 만큼 단단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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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방송작가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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