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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Nov 12. 2019

협찬의 추억

죄책감은 업무의 연장


교양작가라면 피하기 힘든 숙명, 바로 ‘협찬’ 방송이다. 제작비가 부족한 교양 프로그램의 상당수는 협찬으로 돌아간다. 이제 시청자 역시 “에이 그거 너무 협찬 티 나는 거 아냐?”할 만큼, 협찬은 불편하면서도 익숙해진 존재다. 대부분의 방송작가는 협찬 방송을 힘들어한다. 협찬사라는 갑을 하나 더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젠틀한 곳도 가끔 있지만, 까다로운 곳은 “이 건강식품이 암에 좋다는 걸 홍보해야 하니까 암 사례자는 최소 두 명 이상은 꼭 넣어주세요.”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특정 질병까지 정해서 요구한다. 그러면 작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 국내에 수입된 지 3개월밖에 안 된 특정 제품을 먹고 암에 도움을 받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먹어봤을 ‘홍삼’ 같은 아이템은 차라리 양호한 편이다. 대중적인 제품일수록 관련 사례자를 섭외하기 쉽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가기도 좋다. 하지만 작가에게 그렇게 손쉬운 일이 선물처럼 뚝 떨어질 리는 만무하다.      


“네? *홍삼으로 다이어트를요?”

[협찬상품의 대표성을 띄어 가상의 소재로 사용]     


홍삼이란 무엇인가! 겨울철 감기 예방을 위해 먹는 대표적인 국민 건강식품 아니었던가. 최근에는 항암효과가 알려져 더욱 위상이 높아졌지만, 다이어트라니요. 협찬사는 종종 주요한 효능을 놔두고, 자신들의 새로운 구매 타깃 쪽으로 홍보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협찬사는 방송에 자신들의 제품이 30여 초가량 노출되는 데 수백에서 수천만 원을 방송국에 투자했을 것이고, 그중 1%도 제작진에게 떨어지는 돈은 없지만 우리는 까라면 까야하는 방송국의 일개미인 걸.      


나는 살 빼기의 달인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수소문을 하고, 블로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극적인 감량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부디 그 사람이 홍삼을 즐겨 먹었길 바라면서. 5kg 갖고는 방송 소재로 턱도 없다. 많이 뺄수록 좋지만 최소 10kg 이상은 살을 빼야 하고, 살 빼기 전 Before 사진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전에 입었던 바지나 치마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서 “이거 제가 예전에 입던 옷인데요”하며 몸보다 훨씬 큰 옷에 들어가 허리춤에 주먹을 넣었다 뺐다 하는 장면도 필수다.


그러니까 나는 1. 몸무게를 10kg 이상 감량했고 2. 살쪘을 당시의 사진을 갖고 있으며(혹은 인바디 기록이라도) 3. 홍삼을 꾸준히 먹은,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섭외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마지노선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보루를 꺼내야 했다. 에어로빅으로 15kg을 감량한 에어로빅 강사, ‘엉짱 아줌마’ 블로그에 적힌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엉짱님 되시나요? 여기 000 방송국인데요”

“어머 네~!”


“저희가 홍삼의 다이어트 효능에 대해서 방송을 준비하고 있어요. 블로그 보니까 엉짱님이 살을 15kg이나 빼셨더라고요. 그런데 블로그를 살펴보니까 홍삼캔디도 즐겨 드시고, 홍삼탕이 있는 온천에도 다녀오셨더라고요. 혹시 홍삼 좋아하세요?”(이게 말이냐 방귀냐)     


“네? 홍삼이요?”      


황당한 에어로빅 강사 엉짱님은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옳다구나! 분명 망설이는 중이다. 이때를 놓쳐선 안 된다.     


“네 홍삼이요! 우리나라 사람들 몸 챙길 때, 보통 홍삼부터 떠올리잖아요. 부작용도 거의 없고, 몸도 따뜻하게 해서 여자한테 참 좋다던데. 저도 얼마 전부터 먹고 있는데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아 물론, 홍삼으로만 살 뺐다고는 절~대 소개하지 않고요. 엉짱님이 에어로빅을 하시게 된 스토리부터 쭉쭉 풀 거예요.”     


에어로빅 강사 엉짱님은 점점 설득당한다. 그리고 이왕 출연하는 거 챙길 건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아 그러고 보니 겨울에는 홍삼 자주 먹었어요. 그게 다이어트 때문에 먹었던 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살이 확 빠진 게 그때쯤이었네요! 그런데 방송에 저희 에어로빅장 소개도 들어가나요?”     


“그럼요~! 홍삼도 드셨지만, 에어로빅을 꾸준히 하셨기 때문에 그 효과가 훨씬! 컸던 거잖아요. 회원 분들이랑 같이 운동하는 거도 찍고요. 당연히 다이어트 비법으로 들어가야죠!”     


협상 타결. 섭외가 급한 작가와 홍보가 급한 에어로빅 강사가 만났다. 이보다 완벽한 조화가 있으랴. 드디어 사례자를 구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사기꾼이 된 거 같은 기분에 영 마음이 좋지 않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홍삼에 실제로 다이어트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 들어있다는 해외 논문과 실험 자료도 있었다. 어찌 됐든 효능이 있는 건 사실 아닌가. 그녀의 주된 다이어트 비법이었던 에어로빅의 효과도 구성에 넣는다. 무조건 홍삼 덕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당당하지 못한 일이다.      


놀랍게도 방송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은 나가야 한다는 ‘룰’ 때문이다. 그 룰은 때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지 잊게 만든다. 아니, 잊어버리라고 강요한다. 속이 체한 듯 갑갑하다.




모처럼만에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 따따블 베리인가? 그게 그렇게 눈에 좋다대, 안경 쓴 사람이 안경도 벗고. 거 몇 박스 못 구하나?”


“누가 그래요?”


“티비에서 그러던데?”


“아빠, 티비 좀 그만 봐요”     


웃프다. 나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랄까. 방송작가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최대한 협찬방송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양 프로그램은 종류가 그렇게 다양하고 많지 않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면서 사는 게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의 무게 역시 방송작가 일의 한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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