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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Nov 12. 2019

쌍욕을 들으니 몸이 다 아프더라(1)

꽤 많이 아프다


가슴으로 비수 같은 말들이 따발총처럼 쏟아졌다. 몸을 움츠리자 비수는 등에 꽂혔다. 가슴도 등도 보이지 않는 피로 낭자했다. 나는 번데기처럼 몹시 움츠러들었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대걸레 자루로 날 내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대역죄라도 저지른 걸까. 혹은 그렇게 누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꽁꽁 묶인 채 곤장을 맞는 죄인처럼, 나는 무기력하게 온몸으로 언어폭력을 받아냈다.       

   

받아냈다는 말은 틀렸다. 나는 결국 그곳을 탈출했으니까.     


긴 터널과도 같은 방송생활 10여 년 만에 메인작가가 됐다. 그것도 평소 해보고 싶었던 류의 프로그램이었다.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프로그램의 담당 부장은 방송계에서 악명이 높았다. 해당 프로그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그 이름을 알 정도였다. 나는 망설였지만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내공으로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오산이었다.          


50분짜리 방송을 만들려고 한 달 넘게 준비했다. 출연자를 찾고자 피디와 전국 답사를 10여 차례 가까이 다녔다. 피디는 시간에 쫓겨 늘 ‘풀 악셀’을 밟았고, 나는 멀미를 했다. 편집구성안을 쓰는데 꼬박 3일이 걸렸고, 원고를 쓸 때는 20시간 넘게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점점 임박해오는 마감시간을 확인하며 꾸역꾸역 빈 공간을 한 글자 씩 채워나갔다. 나는 그동안 팩트 위주의 프로그램을 많이 담당해왔기에 감성적인 글에는 자신이 없었다. 피디가 넉넉하게 붙여놓은 그림에 도무지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랐다. 최대한 정보를 넣었고, 출연자의 입장을 상상하며 내레이션 원고를 썼다. 훌륭하진 않아도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적정선에서 타협을 해야 했다.          


드디어 시사 날. 보통 내레이션 녹음이 안 된 가편 영상으로 시사를 하는 타 방송과 달리, 깐깐한 부장은 성우 더빙이 된 버전의 편집본으로 시사를 요구했다. 영상과 내레이션을 수정할 것이 뻔했지만 부장은 완성 버전으로 평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두 번 세 번 일을 해야 했고, 돈을 더 주고 성우 녹음도 두 번씩 땄다. 그것이 이 프로그램의 법이니 법에 따르는 게 맞다.          


그날 나는 운이 좀 없었다. 하필이면 성우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1차 더빙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어차피 실제 방송이 아닌 시사를 위한 더빙이니 피디가 성우 역할을 대신하기로 했다. 나는 그게 별일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 역시 오산이었다.          


나는 또 운이 없었다. 그날따라 본사 편집실이 가득 차 부장이 우리 제작사로 직접 온다고 했다. 구멍가게만 한 제작사에는 시사를 할 만한 공간이 없었고, 우리는 황급히 회의실에 TV를 연결해 영상을 세팅했다. 드디어 본사 부장과 부하 직원이 도착했다. 부장은 아침에 부부싸움이라도 한 듯 이미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있었다. 나와 피디는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회의실로 모셨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젠장! 부장은 우리 팀 팀장님과 조연출까지 모조리 회의실로 소환했다. 본사에서는 보통 피디와 작가만 시사를 참여했었다. 모든 팀원이 이동하기엔 소모적이고, 공간도 작았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엔 우리 제작사 안에서 시사를 하는 바람에 들어오지 않아도 될 팀원들까지 모두 부른 것이다.          


“이번에 성우 스케줄이 안 맞아서 더빙을 제가 했습니다.”          


피디는 멋쩍은 듯 영상을 틀었고, 나는 이내 식겁하고 말았다.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피디의 더빙 상태가 심각했다. 아무 감정 없는 로봇처럼, 국어책을 읽듯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울고 싶었다. 이날처럼 성우의 중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분명 피디가 최선을 다해 내레이션을 읽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구려도 너무 구렸다. 원고의 완성도가 100이라면, 맛깔난 성우 더빙을 입힌 방송은 130이었고, 무뚝뚝한 피디의 더빙은 60이나 될까.           


영상을 튼 지 5분 정도 지나자 부장은 욕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시발. 멈춰봐!”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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