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四旬節)은 사춘기요, 갱년기올시다

사순 제1주일 / 마르코복음 1,12-15

by 글방구리

음전하와 양전하가 만나서 발생하는 번개와 천둥. 하늘에서 번쩍하고 내리 꽂히는 번개만큼, 땅이 흔들릴 것처럼 큰 소리를 내는 천둥만큼 가정을 뒤흔드는 게 있다면, 아마도 사춘기와 갱년기가 부딪히는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자신의 사춘기와 갱년기를 다 거쳤음은 물론, 아이들의 사춘기와 우리 부부의 갱년기가 만나는 불꽃 튀는 시기까지도 겪었습(... 겪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나니, 치열했던 그 시간들의 의미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기는 듯합니다.


어린이로서 살았던 영육을 벗어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는 사춘기와, 여성 남성이라는 고유한 성징과 매력을 내려놓고 통합된 '인간'을 향하기 시작하는 갱년기가 서로 다른 특성을 갖기는 하겠습니다만,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달라지는 몸의 변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분노,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데서 오는 외로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데서 오는 다양한 감정들이 그런 것들이겠죠.


저는 그 두 시기가 가장 힘든 이유를 이렇게 정의해 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시기가 사춘기고, 앞으로 어떻게 죽어가야 할지 몰라서 흔들리는 시기가 갱년기라고 말입니다.


개똥철학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드리고 싶은 얘기는 이마에 재를 바르며 시작된 사순절이 인생의 사춘기요, 갱년기 같다는 말씀이올시다.


저는 한동안 사순절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하며 지냈더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느끼며 고신극기(苦身克己)하는 시기이므로, 제게 즐거움과 쾌락을 주었던 일들은 하지 말자고요. 예를 들면, 드라마 보지 말자, 맥주 마시지 말자, 고기 먹지 말자 그런 것들이죠. 그러자니 날마다 작심삼일입디다. 지키지 못할 약속만 남발하니 남는 건 자신에 대한 실망이고 자괴감뿐이더라고요. 결심을 다소간 지켰다고 해도 부활절이 되면 제가 부활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눌러 놓았던 제 쾌락만 부활하더라는 거죠.


그다음 해 사순절에는 '특별히 해보자'는, 포지티브 버전으로 바꿔 봅니다. 남 모르게 자선을 베풀어 보자, 한 번 더 웃어 보자와 같은 결심이죠. 그런데 '하지 말자'와 '해보자'는 것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결과를 가져오더라고요. 단식을 하자는 것은 밥을 먹지 말자는 말이고, 웃어 보자는 것은 짜증을 내지 말자는 말이라. 곧장 가나 에둘러 가나 도착지는 같은 곳, '아,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의지가 약해 빠진 인간이구나'라는 자책의 수렁이었습니다.


올해라고 달랐을까요? 그럴 리가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지요. 여느 해처럼 사순절을 기다리며 '올해 사순절은 어떻게 보낼까? 뭘 해야 하지? 아니, 뭘 하지 말아야 하지?'를 마음속으로 자주 물었습니다.


그러다 얼핏 알아챈 것 같습니다. 사순절은 무엇을 더 하거나 하지 않는 시기가 아니라, 뭘 해야 할지, 뭘 하지 말아야 할지를 묻는 시기라는 것을요. 마치 사춘기와 갱년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를 혼자 외롭게 묻고 또 묻는 때가 사순절이라는 것을요.


예수님은 공생활을 앞두고 광야로 나가십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당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고 살아야 할지 암담하셨던 것 같아요. 예수님은 하느님께 직접 길을 여쭙기도 했겠지만, 자신과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 당신보다 앞선 길을 걸었던 세례자 요한도 떠올리셨을 겁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스승이셨으니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서 간 스승을 따라 해 보는 건 '순리(順理)'입니다. 바람을 거슬러 맞서지 않고 물처럼 자연스레 흘러가는 이치대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자연스레 광야로 이끄셨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그렇게 찾은 공간이 광야라면, 사십 일이라는 기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자 구세주인 예수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합니다. 사춘기 청소년의 방황, 공부를 마치고 직업을 고르는 취준생의 불안, 자녀들을 떠나보낸 갱년기 부모의 허탈함, 죽음을 준비하는 황혼기 노인의 두려움 등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다 짊어지고 광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여러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들은 바른 가치관, 인생관을 방해하는 것들이죠.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할 거냐, 아니면 그와는 다르게 살 거냐, 하는 갈림길에서 '가장 필요한 한 가지'(루카 10,42 참조)를 찾아가는 과정인 듯합니다.


장면마다 복선이 숨어 있는 드라마처럼 오늘 짧은 복음 안에서는 특별한 뜻이 담긴 낱말들도 눈에 띕니다. '들짐승'이나 '천사의 시중' 같은 말들입니다. 예상하기는 했으나 정작 맞닥뜨려지고 나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돌발상황을 '들짐승'이라고 한다면, 몸서리쳐지게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실은 천사의 날개 안에 보호받고 있어 안심해도 되는 곳이 광야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광야는 역설적으로 매우 안전한 곳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올해 여행하는 도중에 재의 수요일을 맞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마에 재를 받으며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기는커녕, 그날은 다른 날보다 오히려 더 맛있는 만찬을 즐기고 말았습니다. 그뿐인가요. 성당을 쉽게 찾기 어려운 지역을 주로 다니다 보니, 주일미사도 연거푸 걸렀답니다. 하지만 그걸로 죄책감을 느끼진 않습니다. 제게는 이번 여행 자체가 광야를 향한 여정이기도 했거든요(이렇게 쓰면 가톨릭 신자가 주일미사 궐한 게 자랑이냐, 고해성사 볼 일이다, 그걸 자랑스럽게 글에 쓰냐, 하고 꾸짖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창밖으로 넓게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면서,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내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실까? 앞으로 어떻게 '고통과 죽음'을 살아야 할까?'를 시시때때로 생각했습니다.

사탄의 유혹도 집요하게 따라붙었습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돈을 더 벌어야 해. 내게 이득이 안 되는 일은 관두자. 뭐 하러 손해를 보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자. 새로운 일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겠어?' 등등.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는 낯선 광야에서 혼자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느낌이에요. 그러니 정답을 찾아들고 일상으로 복귀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사나흘 후면 제 여행은 끝이 나고, 뭘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시기, 같은 질문을 반복해 묻는 시기, 바람에 몸을 맡긴 갈대처럼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시기인 사순절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니까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 뒤에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Und sogleich trieb ih der Geist in die Wüste; und er war vierzig in der Wüste und wurde vom Satan versucht, und er lebte bei den wilden Tieren, und die Engel dienten i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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