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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선물에 대한 단상

선물은 물건만 주어야지 부담까지 주어선 안 되리라

by 글방구리

한가위 명절을 보내며 선물을 몇 군데 주고받았다. 제주에 사는 오빠는 제주에서 나는 과일을 보내주었고, 언니는 쿠팡을 처음 이용해 본다면서 김부각 한 박스를 보내왔다. 나도 친정과 시댁 시누이, 시이모님 등 그간 나와 우리 가정에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분들에게 작은 물건을 골라 보냈다. 명절에 가까워지면 택배 물량이 많아져 제 날짜에 도착할까 염려되는 것도 있지만, '선물'이라고 보내면 상대방도 '선물'로 답하려고 할까 봐 두어 주간 앞서 보내며 "추석 선물은 아니고, 맛있어 보여 맛보시라고요."라는 문자를 함께 보냈다. 선물을 선물로만 주고 싶지, 그 안에 부담까지 넣어 보내고 싶지 않아서다.


지난여름, 만 60세 이른바 '환갑'을 지낸 나는 가족들로부터 넘치는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시댁 쪽으로는 유난히 동갑내기 배우자를 많이 두게 되는 바람에 올해 환갑을 맞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지난봄, 작고하신 시어머니 성묘를 다녀오면서 식사를 함께하며 이른 합동 축하를 받았었다. 또 생일 당일에는 남편과 아이들(주로 남편이 다 했지만)이 아침상을 정성껏 차려주었고, 하룻밤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푹푹 찌는 여름날, 가족 모두 한복을 빌려 입고 고궁에서 사진 촬영을 한 것은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다.


예전에야 수명이 짧아 환갑을 잔치까지 하면서 축하했지만, 사실 지금 환갑은 남들에게 축하를 받을 만큼 장수했다고 말할 나이는 아니다. 나 자신이야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누군가 60세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아 안타깝다. 20년쯤 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도 당시 64세였는데, 내가 곧 그 나이가 된다니 마음이 이상하다.


아무튼, 그렇게 거하게 축하를 받고 나니 올해 더는 축하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추석 전날, 아이들 수업하려고 들른 어린이집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두 선생님이 직접 뜨개질을 해서 만든 손가방과 와인, 그리고 축하 카드를 주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 코끝이 시큰해졌더랬다. 나이 먹은 게 뭐라고 축하를 해주느냐고 너스레를 떨고 말았지만, 이미 지난 생일이라도 명절을 핑계 삼아 챙겨주려 했던 그들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고 고마웠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들에게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내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들을 쭉 훑어보았다. 퇴직을 하고 나서는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고 지내려고 하는 바람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들의 이름이 주르르 올라온다. 내가 아꼈던 사람들도 있고 나를 아껴준 사람들도 있다. 친구들도 있고 옛 동료도 있다. 어떻게 '친구'로 등록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연락처들도 있었다.


'이 사람한테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게 맞지.'

'이 사람은 그래도 나한테 명절 인사를 보내오지는 않을까?'

'이 사람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혹시 연락처가 바뀐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코로나 때 친구가 죽은 줄도 모르고 몇 해 동안 그 친구의 연락처를 저장해 놓고 있었던 터라,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했던 친구들은 그 번호가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대화에 참여를 했든 안 했든 단톡방에서야 그럴 일이 없지만, 번호만 저장해 놓았던 경우는 무소식이 정말 희소식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추석날 이른 아침, 내가 속한 단톡방에는 먼저 명절 인사를 올렸다. 내가 막내인 친정 톡방에서는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맞다 싶어 부지런을 떨었다. 이미 작은 물건이 오가며 인사를 나눴던 시댁 식구들은 건너뛴다. 그런데 어느 톡방은 내가 가장 연장자다.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그냥 먼저 인사를 올린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내가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톡방에 인사말 남기는 거야 누가 먼저 하든 무슨 상관이랴 싶다. 하지만 아무리 돈 안 드는 인사말이라도 먼저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내게 남은 자존심이었을까?


대체로 아무리 작은 선물(膳物)이라도 그것에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 있을 때는 선물(善物)이다. 하지만 간혹 기쁘고 고마운 마음보다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물건도 있다. 그것은 물건 그 자체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의 태도와 상황에 달려 있다.


한동안 어느 목사가 영부인에게 3백만 원짜리 명품백을 선물한 일로 세간이 시끌시끌했다.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기도 했으나 나는 그 영상을 보면서, 목사가 느꼈을 모멸감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후줄근한 티셔츠 바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찬물 한 잔을 요청하는 목사에게 "여기 쌍화차 한 잔 갖다 드려"라고 하는 모습은 영부인의 품격은커녕 마주 앉은 상대방의 품위까지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장면으로 보였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뇌물인 가방을 굳이 선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니 이제부터 선물의 의미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한가위가 지났으니 다음 명절은 설이다. 그때에는 내가 주는 선물이 크든 작든 마음에서 우러나서 주는 선물이 되기를, 또 그것이 받는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굳이 물건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아무 거리낌이나 주저함 없이 내 휴대폰 안에 저장된 모든 사람들에게 다정한 명절 인사와 축복을 빌어줄 만큼 나 자신이 너그러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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