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 엔딩의 시작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호스피스 병동에는 임종실이 있습니다. 병실에서 지내던 환자가 가능한 편안하게 마지막 숨을 들이쉴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입니다. 그간 임종실에서 만난 환자들 모습은 십여 년 전 다른 병원의 임종실에서 보내드린 시어머니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거칠고 힘겨운 숨을 몰아쉬곤 하시지요.
그러나 환자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 지인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 몸을 가누지 못하며 슬픔에 젖어 있는 분이 있는가 하면, 길어지는 임종의 시간이 지루한 듯 소파에 앉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족도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이 살면서 어떤 관계였는지 그 가정사를 알지 못하기에 가족의 태도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작은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새삼 깨닫지요, 죽음은 정말 아무도 동행할 수 없는, 혼자 가야 하는 길임을요.
임종실이 아닌 병실에서도 저는 환우보다 환우를 돌보고 있는 가족에게 더 눈길이 가곤 합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느냐며 휴직을 하고 24시간 아버지를 수발하는 40대의 아들도 있고, 호스피스를 선택한 환자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해 매사에 불만스러워하는 20대 초반의 딸도 있습니다. 쉰 살도 채 안 되어 얻은 말기암에 십 대 아들과 칠십 대 친정엄마가 함께 병실을 지키기도 합니다. 길어지는 병원 생활에 지쳐가는 가족을 대신해서 아르바이트 삼아 병실을 지켜주는 교회 권사님은 돋보기를 쓴 채 성경책을 읽습니다.
죽음을 앞둔 병실 냄새와 그 곁을 지키는 산 사람의 향기. 하나의 시계 안에 있는 시침과 분침처럼, 산이와 죽는 이의 시간은 다른 템포로 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묘하게 공존하는 곳, 흑백으로 대비되는 두 개의 본질이 하나의 곡을 조용히 연주하는 것 같습니다.
전 비록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앓고 있는 환자에게서는 죽음을 배우고 곁에 선 가족에게서는 삶을 배웁니다. 태어난 시간을 선택하지 못했던 우리는 돌아갈 시간 역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도, 삶도 다 잘 배워 두어야 합니다. 제가 병상에 먼저 누울지, 먼저 누운 누군가 곁에 서서 돌봄을 하게 될지 그건 하느님만 아실 테니까요.
지난여름, 너무 더웠다고 불만을 터뜨리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저는 시원하게 보냈습니다. 집에도 일터에도 마음껏 조절할 수 있는 에어컨이 있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땀을 씻어줄 물이 언제든 나왔습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냉장고 안에는 얼음물이, 냉동실에는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지요.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도 비 피할 집이 있고, 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갈아입을 옷은 장롱에 빼곡합니다.
물난리가 나지도, 산불이 나지도, 가뭄이 들어 단수가 되지도 않는 곳에서 삼시 세끼 챙겨 먹고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던 건, 거저 누리는 복이었을 뿐입니다. 아니, 지금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부터가 공짜로 받은 복임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죽음도 거저 누리는 복일까요? 머리로는 끄덕거리지만 아직은 흔쾌하게 답하기 어려운 걸 보면, 앞으로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처서 절기에도 꿈쩍 않던 수은주가 백로가 막 지난 오늘 아침 아래로 꽤 내려갔습니다. 드디어 여름이 갔구나, 가을의 시작을 예감하며 오랜만에 [글루미 릴레이]를 펴 들었습니다. 진아 작가님의 '엔딩의 시작'을 다시 읽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이다. 부족함 없이 완벽해 보여도 생을 포기하는 자가 있는 반면 벼랑 끝에 서 있어도 끈질기게 나아가는 자가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예정된 죽음 어느 쪽이 덜 고통스러울까. 당연하게 이어지던 아침이 마지막 날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선고된다면?"(189)
"주형아, 죽음은 더 이상 새드엔딩이 아니야. 누나는 이제 가벼워. 다 비워냈으니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내가 비운 삶을 이젠 네가 멋지게 채워줘. 그게 누나가 바라는 해피엔딩이야."(193)
엿가락처럼 늘어졌던 마음이 청량해집니다. 결국 외롭게 가게 될 죽음도 새드엔딩이 아닐진대, 우리 삶에 뭐 그리 '새드'할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잠시 새드 하더라도 누군가 해피할 테고, 내가 해피하다고 느낄 때 아직 새드 할 누군가를 위해 마음 한 자락 내어주면 이러구러 한 세상 살아지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