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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때 더 아름답기를

2022년 4월 5일 화요일 / 청명, 식목일

by 글방구리

청명에는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속담이 있다. 초보농사꾼은 자기 실력보다는 절기의 기운에 기댄다. '옛 조상들이 그런 거라면 그런 거니까, 오늘은 뭘 심어도 싹이 날 거야.'


서랍을 뒤져 씨앗을 찾았다. 토종 농산물 씨앗을 나누시는 선생님으로부터 오래 전에 받아놓은 토종 대파 씨앗을 들고 텃밭에 갔다. 아침 일찍 나선 길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보다 앞서 와서 호미질을 하는 부부가 계셨다. 그분들 밭은 꽤 넓어 보였다. 농장주인 이웃이 내 밭에까지 미리 검정 비닐까지 덮어놓으셔서 남아 있는 곳도 별로 없지만 소심한 호미질을 하며 대파 씨앗을 심어놓고 돌아섰다.


다음번 코스는 집 뒷편의 나대지. 몇 년 동안은 비어 있다가, 작년에는 누군가 밭을 일구시더니, 얼마전에 팔렸다는 말을 들었던 땅이다. 밭을 가득 채웠던 고추, 옥수수 들은 여름내 키워낸 자식들을 다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되어 그 자리에 말라죽은 채 겨울을 났다. 단물만 홀랑 빼먹고는 뒤처리도 하지 않고 간 작년 소작인들도, 큰돈 들여 땅을 사고도 들여다보지 않는 새 주인도 누렇게 말라죽은 저 빈몸들에는 관심이 없다.

어쨌거나 동네 고양이들에게는 재벌집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널찍한 화장실이겠으나, 사람들은 그곳에 밭을 갈 요량도, 집을 질 계획도 없어 보이니, 그곳에 꽃씨나 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가을, 아이들의 고사리 손을 빌려 받아놓은 족두리풀 씨앗과 들살이 가서 가득 받아온 코스모스 꽃씨. 심기도 하고 뿌리기도 했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자기 힘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으니, 부디 좋은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우기를! 깨알보다 작고 솜털보다 가볍지만 너희들 안에 분홍빛, 보랏빛 고운 꽃들이 있음을 알고 있나니, 부지깽이의 싹도 틔워주는 청명의 기운을 받아, 마른 땅을 뚫고 힘차게 솟아나기를!

20220405_083609.jpg 농부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밭. 잡초라 불리는 생명들이 신나게 영토를 넓혀가겠지.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씨앗을 뿌리고 여름꽃을 꿈꾸는 동안 봄꽃은 어느새 지고 있다. 봄이 짧듯 꽃도 짧다. 가지마다 빈 곳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앵두꽃만 아직 한창이고 영춘화는 이미 다 떨어진 지 오래다. 어지간히 뜸을 들이다 핀 매화도 꽃자리만 남긴 채 꽃잎은 눈꽃처럼 날리고 있다.

목련은 필 때는 한 송이 한 송이 우아한데, 뚝뚝 떨어질 때는 추하기 이를 데 없다. 밟은 사람이 없어도 밟힌 듯 져 버리는 목련을 보면 짙은 화장을 지운 늙수그레한 여인네 같다. 매화는 꽃진 자리마다 매실이 볼록하게 올라오지만, 목련은 그렇게 알토란 같은 자식들도 남기지 못한 모습으로 보인달까. 벚꽃은 또 얼마나 허망한지. 찰나의 세월을 즐기고 가는 한탕주의 같아, 한밤의 벚꽃 축제에도 그다지 깊은 마음은 주지 못하겠더라.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 꽃을 만나고 싶다.

20220405_083919.jpg 보톡스로 피부를 팽팽하게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늙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목련. 이래서 목련은 별로다.

기왕에 뿌린 꽃씨들이니 싹이 났으면 좋겠다. 대파도 싹이 나서, 여름 내내 잘라다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싹이 났으면 꽃이 또 피고, 꽃진 자리에는 열매도 풍성하게 열리면 좋겠다. 열매를 먹고 나면 씨앗들을 또 다시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년에 심을 씨앗까지 주고 나서는 기왕이면 예쁘게 떨어지고, 예쁘게 한 생을 마감하면 좋겠다.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 내년에 돌아올 씨앗을 품어주고, 그 씨앗이 또 싹을 틔우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아름답게 돌고 돌면 좋겠다.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20220405_084202.jpg 겨우내 얼었던 땅 속에 숨어 있던 옥잠화, 올해도 싹을 틔워주었구나. 고맙다,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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