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나을까, 글이 나을까?

2023년 2월 15일 수 / 장단점을 알려주는 무거움을 담을 때

by 글방구리

"말로 하는 건 쉬운데 글로는 못 쓰겠어요."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아이들이 가끔씩 호소하는 어려움이다.

"그럼 그건 쓰지 말고 말로 해볼래? 너희가 말로 하면 내가 받아 적어 줄게."

글로 쓰기 어려우면 말로 해보라고 하지만, 그렇게 기회를 얻고 나면 꼭 어떤 아이는 다르게 말한다.

"어, 나는 말하는 게 더 잘 안 되는데, 그냥 글로 쓰면 안 돼요?"

평소에는 말을 잘하던 아이도 써야 할 글을 말로 하라고 하면 앞뒤가 바뀌고 한 말 또 하고, 음, 에, 또 하는 군소리가 들어가면서 어버버 하기가 일쑤다. 그러고 보면 원래 자기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잘 담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그걸 말로 하느냐 글로 하느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글로는 에둘러 쓸 수 있어도 말로 하기 참 어려운 것도 있다. 그것은 아이의 단점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아이가 글을 잘 쓰거나 바른 행동을 했을 때 칭찬해 주기는 쉽다. 그저 그 아이가 했던 노력을 구체적으로 짚어주기만 해도 칭찬이 된다. 칭찬은 객관적이다.

하지만 단점이나 아이가 고쳐야 할 행동을 지적해 줄 때는 내적 검열을 거쳐야 한다. 내가 지금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아이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닌가? 선입관을 갖고 있진 않은가?편파적이지 않은, 공정한 잣대인가? 양심에 걸리는 것은 없는가? 내가 지적해 주어도 되는 분야의 행동인가(=공연한 오지랖은 아닌가)? 내가 꺼내려는 말은 적절하게 선택된 말인가? 아이에게 오래 남아 상처가 될 말은 아닌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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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동안 같이 지낸 아이들과 마지막 수업을 하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찾아 써보기로 했다. 학교에서는 앞으로도 만나겠지만 글쓰기 시간에는 만나지 못할 거니까, 이렇게 장단점을 말해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교사 혼자 말해주는 것보다는 서로서로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대신 장점은 두 개씩, 단점은 딱 하나만 말해 주기로.

수업을 준비하면서 문구점에 들러 예쁜 편지지와 봉투를 샀다. 편지지는 가장 작은 크기로, 모양과 색상은 가능한 다양하게 골랐다.

"얘들아,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오늘은 서로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거야. 장점이 뭔지 어려우면 고마웠던 점이나 칭찬해주고 싶은 것을 쓰면 되고, 단점을 찾기 어려우면 그 친구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었던 걸 적어도 돼. 하지만, 너희가 쓸 수 있는 가장 반듯하고 예쁜 글씨로 써주면 좋겠어."

백지를 받아 든 아이들은 연필을 입에 물기도 하고, 백지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고민한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 장점이 뭐야? 너 뭐 잘해?" 하고 묻기도 한다.

"본인에게 물어보지 말고! 너희, 이렇게 오래 함께 지냈으면서, 친구가 뭘 잘하는지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자, 초안을 다 쓴 사람부터 마음에 드는 편지지를 골라 가라. 글씨를 정말 정성껏 써줘야 해."

장난하는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한번 꾹 눌러줬더니, 그제야 연필을 잡고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가끔 멍하니 다른 데를 보기도 하고, 지우개로 싹싹 지우기도 하고, 책상에 들어가기라도 할 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집중하는 요 모습이 가장 예쁘다.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 소리는 그야말로 마음을 힐링시켜 주는 치유의 백색소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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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다 썼다면서 편지지를 가지러 온다.

내가 말한 것처럼 "장점 1,2 단점 1" 이런 식으로 간단히 나열해 온 것부터, 한 명 한 명에게 긴 편지를 쓰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장점을 찾는 것보다 단점을 찾는 것을 훨씬 더 힘들어했다. 심지어 "얘는 단점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아무리 봐도 단점을 찾지 못했단다. 완벽하단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수려가 쓴 편지였다.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해 보면 좋겠어." "장난을 한 쳐주면 좋겠어." "너의 단점은 달리기가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내가 더 못하는 것 같아ㅋ ㅋ" "너만 있으면 충분해."

남의 단점을 지적해 주면서, 어찌 이렇게 부드럽고 기분 좋게 할 수 있는지!

수려는 친구의 단점을 쓰면서 "~하면 좋겠어."라고 썼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벌써 감정코칭식 말법을 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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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도 유행이 있다. 십여 년 전에는 '감정코칭'과 '나-전달법'이 대세였다. 요즘은 오** 박사님의 상담이 가장 핫한데,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감정코칭'이었다. 아이의 문제행동에는 단호하게 대하되, 감정을 먼저 읽어주라는 것, 그리고 '나'를 주어로 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들 사이에서는 "그랬구나~! **이가 화가 났구나." 하는 식의 '구나체'를 쓰려고 했다.(현 대통령이 쓴다는 구나체와는 묘하게 다른 뉘앙스. 이 구나체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던지는 반말식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이 '구나체'가 오남용 되는 바람에, 아이들이 엄마가 제발 "그랬구나"라는 말을 안 하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오글거린다고. 원래 하던 대로 차라리 그냥 화를 내라고.

지금 청년이 된 조카아이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방에 가서 얘기 좀 할까?'라고 하는 말이 가장 싫었어요. 그냥 화내고 나면 빨리 끝날 일을, 방에 데리고 들어가면 얼마나 길게 얘기하는지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아이에게 화를 내면 안 되고,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 되고, 이러면 안 되고, 저러면 안 되고. 물론 감정코칭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의존하는 바람에 부작용이 있었다는 것이지.

그즈음, 내가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자주 쓴 말도 바로 그거였다. "**아, ~~~ 하면 좋겠어."라는. 지금 와 생각하니 나도 참 잘못 쓴 사례가 많다.

"**아, ##이를 때리지 않으면 좋겠어."('아니, ##이를 때리면 안 되는 거지, 때리지 않으면 좋겠는 건 뭐지?')

"**아, 자려고 노력해 보면 좋겠어."('잠이 안 오는 걸, 자려고 노력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물론 적절하게 쓴 적도 많았겠고, 명령형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나의 바람을 담아 말했으니 더 부드럽게 들리기는 했겠지만, 나는 오늘 수려가 친구의 단점을 적으면서 쓴 글이 훨씬 더 적절했다고 이제야 느낀다.

말은 증거가 없이 마음에 남고, 글은 잊힌 듯했다가도 훗날까지 남는다.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고르고 골라서 해야 한다. 그 대상이 아이들이라면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 그 내용이 장단점에 관한 거라면 더더더더욱더 그래야 하고.

*

아! 글쓰기 방 막내 민재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해서 그럼 세 사람한테만 쓰라고 했더니, 그제야 연필을 잡는다. 그러곤 형한테 묻는다.

"형! 형 이름이 단후야, 단우야?"

'아이고, 녀석아. 넌 장단점 찾는 것보다 형아 이름부터 알아야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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