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비사비 라이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소중한 장소

by 글빛승연

"아이고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나 보네요. "

물이 샌다면서 아랫집 할머니가 올라와서 십몇 년째 살고 있는 집을 보고 한 말이었다. 문 앞에 쌓인 택배 박스에서부터 정리되지 않고 탑재된 거실의 물건더미들을 보면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신혼집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결혼을 하고 남편이 혼자 십 년 넘게 살던 집에 내가 그대로 들어가서 살았는데 이미 남편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상당했다. 한마디로 그는 맥시멀 리스트였다. 뭐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주의였다. 처음 혼자 사는 집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스탠드가 방마다 있는 것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심지어 책상에는 집게형 스탠드가 세 개나 꽂혀 있었다. 가제트 팔이 달린 책상 옆으로 웬 전선이며 멀티탭은 또 그렇게 많은지 누가 보면 전기수리공이나 전선 발명가로 착각할 법했다. 이 방에 불이라도 나면 진짜 무슨 일 나는 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상상마저 들었다. 전기제품을 좋아하는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본인이 직접 만들고 설치하는 것도 좋아하는 탓이었다. 책상 옆으로는 난생처음 보는 카메라 냉장고가 있었고 컴퓨터 모니터가 두대, 본체가 세대나 있었다. 저기요~ 혹시 직업이 컴퓨터 프로그래머인가요?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의 쇼핑 스케일은 남달랐다. 이동식 블루투스 스피커, 컴퓨터용 스피커, 티브이용 스피커 등등 용도가 다 다르다며 구입한 스피커가 네대였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인터넷 쇼핑을 하고는 했는데 그 대부분이 생필품이었다. 샴푸, 치약, 세제, 수세미 같은 것들이 집에 박스채로 쌓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많이 사냐고 하면 어떤 날은 좋은 거라서 한번 사봤다고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두면 다 쓸 건데 넉넉하게 사는 거라고 했다. 청소는 남편이 나보다 잘해서 두고 보긴 했는데 락스가 박스로 오는 날엔 솔직히 좀 공포스러웠다. 그 후로도 남편 방에는 하나였던 책장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났고 거기에 맞춰 소장용 책도 늘었다.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서 집에 복사기만 한 공기청정기가 도착한 날은 결혼하고 나서 두 번째로 공포스러운 날로 기억한다.


지금은 짐이 되는 건 딱 질색이지만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나 역시 집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결혼서약서에 '앞으로 다시는 큰돈은 쓸 수 없다'는 항목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결혼 날짜를 일찌감치 잡아놓고 신혼살림을 장만하면서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은 만큼 사고 또 샀다. 식탁도 침대도 거실장도 제일 크고 튼튼한 걸로 샀더니 나중에 아이 있는 집은 다 있다는 장난감 서랍장 하나 둘 자리가 없었다.



그런 우리가 얼마 전 결혼하고 7년 만에 처음으로 이사를 했다. 이번이 기회라는 심정으로 버리고 또 비웠다. 옷도 몇 자루나 버리고 오래된 소파도 버리고 내 책과 아이들 책도 몇 박스나 정리했다. 새 집으로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정돈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버릴까 말까 하다가 버리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지만, 남편을 설득해서 그의 짐을 덜어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전보다는 심적으로 조금 더 여유롭다. 푹신한 소파 대신 텅 빈 벽이 주는 어색함이 오히려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요즘 집에서 다양한 놀이로 그나마 하루를 때우는 아이가 오늘은 '티(tea)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이는 티파티를 위한 초대장을 만들고 차를 준비하며 신나 했다. 비록 오미자 원액에 물을 희석하는 단순한 조제법이었지만 평소 내가 아끼던 커피잔을 내어주며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꽤 들떠보였다. 이동식 테이블을 베란다 창 앞에 펴고 아이와 앉아 예쁜 잔에 오미자차를 함께 마시니 잠깐이었지만 어느 호텔의 에프터눈 티에 초대받은 것처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잘 지켜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x9791155811344.jpg 와비사비 라이프 / 줄리 포인터 애덤스 / 윌북


욜로, 카르페디엠, 미니멀리즘 이런 개념들과 유사한 것 중 '와비사비(わび・さび)'라는 말이 있다. 책에 따르면 와비사비는 단순하고 겸손하며 알 수 없고 덧없는 속에서 조화와 기쁨을 발견하는 정서라고 한다. 덴마크 작가 레오나드 코렌은 그의 저서 <예술가, 디자이너, 시인과 철학자를 위한 와비사비>에서 '가장 기본만 남을 때까지 줄이고 없애되, 시적인 요소는 남겨둬라'와 같은 근사한 표현으로 와비사비를 정의한다. 사진이 풍부해서 잡지처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책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작가가 매거진 [킨포크 KINFOLK]의 프로듀서였다. 저자는 와비사비 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을 만나 와비사비의 감성과 이미지를 전한다. 일본뿐 아니라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캘리포니아까지 유럽에서도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가능하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사를 하고 나서 계속 집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궁리 중이던 나에게 책 속 글귀들이 가이드가 된다.


집은 마음속에 영감과 활력을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 집의 공간마다 물건이 꽉 들어차 있다면 상상력을 꽃피울 수도, 편히 쉴 수도 없다. 물건을 살 때는 즐거움보다 하나의 물건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소중히 사용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지금 있는 것을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기게 된다. 벽면을 가득 채운 예술 작품이나 책이 넘치도록 꽂혀 있는 책장보다 한 개의 라탄 의자나 아름다운 꽃병 한 병, 흑백사진 한 점이 더욱 돋보인다. 단순하게 꾸미면 손님이 왔을 때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진다.


집들이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서도 약간은 해소된다.


불완전함에서 미를 찾는 와비사비를 받아들이면 손님이 찾아왔을 때 모든 것이 그림처럼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완벽하게 준비된 식탁보다 중요한 건 함께한다는 소속감이고 부족한 대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아니던가. 손님은 나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나누기 위해 모인 것이니까.


아이와 함께 24시간을 밀착하는 요즘 집에서의 휴식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이가 잠시라도 혼자 놀거나 한눈을 파는 시간이면 나도 카톡방에서 수다를 떠느라 열을 올리는 데 시간을 다 쓰곤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보니 왜 이렇게 찔리는 걸까.


와비사비의 핵심은 더 느리고 고요한 태도에 있다. 서둘러 밥을 먹고, 후다닥 대화를 나누고,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문자나 이메일을 거듭 확인하고 휴식시간마저 바쁘게 보내느라 헛되이 낭비한 날은 마음에 무엇이 남아 있던가.
잠깐의 휴식은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시켜준다. 번거로운 계획도 필요 없고 빵이나 쿠키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시간을 내서 이런 휴식 시간을 가지면 된다. 시간도 정할 필요 없이 편한 시간에 짧게 쉬면 그만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가장 소중한 장소, 우리 집에서.

와비사비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을 보고 지극히 평범한 것에서 마법 같은 기적의 순간을 만들 것.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사색하며 정돈된 삶을 살 것. 바로 이것이 와비사비의 핵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책 언제 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