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호월 Feb 07. 2023

커피 한 잔의 여유,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feat. 제주 한 달 살기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다 급하게 환승역에서 내려 인파에 휩쓸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출근길. 그러다 문득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 오늘 휴가 내겠다는 문자 한 통과 함께 바다로 향한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장면처럼 우리는 그런 일탈을 꿈꾼다. 지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짧은 휴가를 통해 열심히 새로운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나를 더 급하게 만들었고 여행지에서 하나라도 더, 한 곳이라도 더, 더더더를 외치며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여행도 지쳐갔다.


 짧은 시간 힘든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에게 힘이 되어준다. 새로운 곳에서 하나라도 더 보며 생성했던 행복 에너지는 나를 반짝이게 해 주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며 단조로웠던 나의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역시 여행의 힘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생각보다 빨리, 나는 다시 일탈을 꿈꾸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만다. 짧아서 그런 것인가 한탄해 보며 조금 더 길고 여유롭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사로잡는다. 성인에게도 방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동안 많은 사람의 위시 리스트에 있던 제주 한 달 살기, 요즘은 제주나 국내 이외에도 외국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는데, 나도 그렇게 오래 새로운 곳에서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위시 리스트 중 가장 첫 번째였다. 하루하루 돌아가는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정말로 운이 좋게도 그렇게 원하던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해보나 하는 생각으로 고민 없이 바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모든 준비도 정말 짧은 시간동안 하고 후다닥 제주도로 떠나게 되었다.


 역시 제주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너무 즐거웠다. 마치 아무 걱정 없이 놀던 초등학생의 방학처럼 한 달을 채워갔다. 그리고 또 방학처럼 말도 안 되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한 달이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는지 의문이다. 놀 때는 왜 그리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것인지.. 항상 놀랍다.


 사실 몸이 조금 좋지 않아 요양도 겸해서 제주를 찾았는데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매번 제주에 여행을 왔을 때는 '환상의 섬, 제주'를 최대한 즐기다 갔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숙소부터 바다 근처가 아닌 중산간 지역을 택했고 명상을 하거나 걱정 고민 없이 시간을 보내는데 최적이었다. 주변이 조용하니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커피 한 잔의 여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잘 만든 문구인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커피 원두를 갈아 천천히 내려 한 잔 손에 들고 마루로 향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긋한 커피 향을 한 모금 마시며 시큼 쌉싸래한 커피를 입에 머금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아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집중해 본다. 그처럼 평화로운 기억이 있었을까.

  비가 내리는 어느 날,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웠다. 태어나서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좀 무섭기도 했는데 또 가만히 마루에 앉아 보고 있으니 이처럼 신기로운 광경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오름으로 향했다. 운동도 하고 자연도 만끽할 겸 이곳저곳으로 다녀보았다. 아침 일찍 사람도 없어 너무 좋았다. 나와 와이프, 우리 부부와 자연만이 있었다. 큰소리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고 때로는 자연의 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어도 좋았다.


 정말 일상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마치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듯한 경험이었다. 매일 바쁘게 일상을 살아내면서도 국내로, 해외로, 그 어디든 여행으로도 바삐 움직이는 일정을 택했던 나였지만 제주에서의 한 달은 지금까지 내가 살던 방식과는 달랐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여유롭게. 그렇게 한 달을 살았다.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쫓기듯 살지 않은 것이. 알게 모르게 매일을 살며 경쟁하듯 살아왔다. 그래서 몸도 안 좋아지고 마음도 지쳐갔으리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런 경쟁으로 가득 찼던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마루에 앉아 푸른 잔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생동적으로 느껴졌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 자극적이고 신나는 것들만 찾아 여행을 떠났지만 오히려 독이었다. 천천히 여유롭게 지루한 여행을 와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조용하게 천천히 그렇게 나에게 집중하니 드디어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어찌 보면 인생도 여행도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그동안 등 떠밀리듯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여정을 가고 있던 중이었으나, 이제야 드디어 나를 보게 되었다. 시간이 어느덧 그 여정의 중간 어디쯤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방향키를 손에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아직도 정확한 방향은 모르지만 그래도 그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커피 한 잔의 여유, 그 여유가 나에게 큰 힘이 될 때도 있다. 지치고 힘이 들 땐 그저 쉬어가도 괜찮다. 필요한 것은 화려한 여행이 아니라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이다.

이전 08화 너는 꿈이 뭐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