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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Dec 03. 2017

'사과'에 관한

혹은, 개념의 불확실성에 관하여


‘사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것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저 사과 맛있겠네.”라는 식의 직접적인 지칭으로 용법을 한정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 단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일상에서 아마 아직 단어를 익히지 못한 아이나 외국인과 대화를 하거나 용서를 구한다는 뜻의 동음이의어로 농담을 거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과’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혼동에 빠지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단어를 사용할 때, 서로 동일한 어떤 대상을 전제한 채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과란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군가는 아주 빨갛게 익은 홍옥(겉껍질은 아주 붉고, 속은 엷은 크림빛이며 신맛이 있다.)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누군가는 후지(붉은 줄무늬가 있는 것이 보통이나 연홍색을 띤다. 과육은 황백색으로 과즙이 많으며 단맛이 많고 신맛이 적다.) 비슷한 이미지를, 또 누군가는 골든 딜리셔스(익을수록 황색을 띠며 과육이 연하며 신맛은 거의 없다.) 같은 품종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모양, 크기, 색깔, 맛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사과’란 단어가 동일한 의미라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단지 동일한 방식으로 조합된 단어를 공유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학적인 관점에서 1이 1.001이 아닌 것은 100이 아닌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과’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대화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단어가 사용되는 확률적 지점, 그러니까 단어를 배우고 익혀서 그동안 자신이 보고 들으며 말하는 가운데 자리 잡은 단어의 쓰임을 습관처럼 전제하고 사용하는 것뿐이다.

이는 마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과정과 유사하다. 일단 배우고 나면 더 이상 중심을 잡는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이 단지 가야 할 길이나 신경 쓸 뿐이고 몸은 습관처럼 알아서 움직이게 된다. 단어는 자신이 목적하려는 의도를 위해 차용되는 것이지 그에 해당하는 정확한 의미와 일대일대응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과’란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거의 없는 단어에 속한다.

이런 언어적 불확실성은 ‘사랑’이나 ‘희생’, ‘정직’ 같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닌 단어로 넘어가면 더욱 복잡해진다. ‘사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의미로 묘사될 수 있을뿐더러 구체적인 상황을 두고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누군가의 행위를 두고 누군가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며, 또 누군가는 그것은 사랑을 가장한 이기심, 또 누군가는 학대라는 전혀 다른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논쟁을 일상생활에서 아주 흔하게 경험한다.  

  

이를테면 근래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페미니즘’이란 단어. 과연 어떤 사람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일까.

여기에서 이 단어의 의미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위에 미리 적었듯이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제각각이란 점. 때문에 그런 주관적인 생각으로 누구를 쉽게 재단하거나 비판하기 힘들다는 점. 그래서 이 단어를 기치로 걸고서 남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근대적 자각에서 출발한 이 단어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태도라는 점이다. 

여성에 비해 공격성과 경쟁심이 강한 탓에 기득권을 쥐고 있는 대다수가 남성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다른 남성이 그 비난의 일부를 감수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폭력이다. 불합리한 사회적 태도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개인이기 때문이지 여성이라거나 남성이라서가 아니다. 여성을 차별하고 비하하고 모욕을 주는 남성은 그 행태는 다르겠지만 같은 남성에게도 최악의 인간이다. 그 나타나는 행태의 차이가 서로가 서로의 관점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인데, 그 운동장은 결코 남성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여성에 비해 남성의 자살률이 훨씬 높다.

여성의 적은 남성, 남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라,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야만성이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적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생각보다 정확한 의미를 담지 못한다. 그것은 정확한 좌표를 알지 못하는 밤하늘에 무수히 흩뿌려진 별들과 같다. 우리는 그중 빛나는 별들을 중심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선을 그어 자신의 문양을 그리며 살고 있는 개별적인 세계들이다. 그리하여 그 문양들은 부분적으로 서로 일치하거나 엇갈리게 마련이다.

그 문양이 일치하거나 엇갈릴 때마다 적과 동지로 나누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진실로 중요한 건 일치 여부가 아니라 서로의 문양을 얼마나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느냐, 그 엇갈림의 길목에서 서로 얼마나 조율해낼 수 있느냐이다. 


# 내가 니편이 되어줄께 - 커피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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