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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l 15. 2017

'나'에 관한 3

불안의 해소.

'나'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이라고 간주한 불안은 단순히 심리적 상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의미를 함축한다. 제대로 인지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의 생존은 일단 본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내 몸의 감각이 내게 주는 신호들이 단순히 본능에 의한 반사적 행동에 불과할지라도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신호의 강도에 대응하는 어떤 체계가 존재해야만 한다. 어느 정도의 배고픔에서 난 울음을 터트릴 것인가. 어느 정도의 소리에 난 반응할 것인가. 내 생리작용에 어느 정도로 격렬한 몸짓을 보일 것인가.


하지만 모든 상황, 모든 감각에서의 기준점을 정해두고 신체가 기계적으로 대응한다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효율적이지도 못하다. 그래서 주어진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종합적이면서 최종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조절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시초일 것이다. 이것은 신경망을 통해 온몸의 세포들을 통제하는 또 다른 세포 덩어리인 뇌 속의 뉴런들 사이에서 발달하며 서로 결합되어가는 방식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이 신호의 흐름은 흔한 자연계의 현상처럼 경로의존성을 보이긴 하지만 그 흐름이 어떤 상황에서는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이 시초는 신경 세포라는 물리적 실체의 연결방식에 근거하면서도 일단 작동한 이후로는 물리적 환경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데, 이는 진화과정에서 생물체가 택한 필연적 선택으로 보인다. 온갖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 대응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주어진 생물적 조건을 토대로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분석해서 적절하게 반응하는 자율시스템이다. 자연계의 모든 변수를 정보화해 처음부터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활 패턴을 지닌 동물로 갈수록 본능에 의존하지 않는 자율적 성향이 강화된다. 인간이 보통은 파충류보다 포유류에게서 좀 더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도 이런 유사성의 정도 때문일 것이다.

    

이 자기조절체는 끊임없이 현 상황이 주는 정보를 감지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경고를 울려야 한다. 생존은 만족보다 부족함에 예민한 쪽이 유리하며, 이런 부족함에 대한 예민함이 바로 '불안'이다. 이것이 첫 문장에서 불안이 논리적 의미를 함축한다고 말한 이유이며. 또한 최초의 감정은 불안일 것이라고 가정한 근거이기도 하다. 본능적인 것이지만 생존을 위한 논리적인 이유로 난 불안에서 출발해 항상 이 감정이 해소되길 원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익숙한 체온과 심장박동 소리를 들려주는 존재에게서 이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다. 불안이 해소된 상태인 '안심'의 감정을 얻고 곧 이 감정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때부터 나는 이 안심의 상태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대체로 나의 보호자들은 나의 안심 상태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난 항상 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보통은 나의 생체적 리듬에 따라 한 시간에 한두 번 잠깐씩 울음을 터트리면 족하다. 그때마다 내게 달려와 날 보살펴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이 불안은 '불만족'의 감정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내 감정의 근원인 불안은 언제나 내 깊숙한 곳에 머물고 있다. 내 삶이 지속되는 한 언제건 튀어나와 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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