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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n 08. 2017

'나'에 관한 2.

불안이라는 시작점.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을 때를 가정해보자. 제대로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 눈은 밝고 어두운 정도나 흐릿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귀로는 그저 웅웅 거리는 소음이 맴돌 뿐이다. 피부로 전해지는 촉감이나 몸속에서 전해져 오는 생리현상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신호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팔다리의 움직임마저도 낯설어 때론 울음을 터트리지만, 아직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나'는 들어오는 정보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때문에 '나'는 오로지 본능에 의해 반응할 뿐이다. 배고픔이 느껴지거나 배변을 본 뒤, 그리고 문득문득 항상 날 보살펴 주어야 할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때 난 반사적으로 울어야 한다. 자신의 결핍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던 내 조상들의 특징은 오랜 세월 동안 유전자의 기록에서 지워져 왔다. 아마도 이런 과정 속에 '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개별적인 요소가 있다면 '불안'이란 감정일 것이다.     


안락한 자궁 속에서의 삶만을 경험한 난 갑자기 세상에 던져졌다. 당장 탯줄로 이어진 안정적인 영양공급과 불쾌한 노폐물의 배출이 사라지고, 부지런히 입과 내장기관을 움직여 소화를 시켜야 하고 배설한 노폐물은 치워주지 않으면 내게 해로워진다. 난 뭔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껏 이어오던 생리작용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구해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다. 다행히 내겐 익숙한 향기와 맥박소리를 지닌 고마운 존재가 곁에 있다. 아마 내가 불안함에 극도로 예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이 존재의 도움 때문일 것이다. 난 그녀의 보호 속에서 조금씩 세상에 익숙해지며 불안을 떨쳐낸다.    


아마 내 정체성의 근간은 이때의 불안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엄밀하게 이 감정은 내 최초의 고향인 자궁 속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출생과 더불어 본격적인 내 행동양식으로써 작용하였다. 물론 근본적인 양식의 토대는 나라 부를 수 있는 존재 이전의 두 유기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그 순간 유전자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양식이 어떤 지향성을 지닐 것인지는 실제 환경에 어떻게 노출되는가에 달려있다.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한 여성과 가끔씩 그녀의 역할을 대신했던 다소 투박한 한 남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구체화된다. 점점 사물과 소리가 구별되고 내 몸의 움직임들에 익숙해지는 것과 더불어 이 고마운 두 사람과의 관계도 점점 뚜렷해진다. 나의 불안에 대해 느끼는 그들의 표정,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행동. 아직 나는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들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 두 사람(혹은 이 두 사람의 역할을 대신하는 누군가)은 나의 불안이 어떤 표현형으로 형성될 것인가에 관한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요소일 것이다.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내가 앞으로 배우고 익힐 또 다른 감정들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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