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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Aug 15. 2016

유치한 사랑의 노래 (13)

삼킬때 까지


창가의 스테인레스 주전자에선 물이 막 끓어오르고, 여자는 두 손으로 볼을 감싼 채, 탁자위로 턱을 괴고 앉아 들려오는 남미여가수의 노래에 고개를 흔들며 리듬을 맞추고 있었다. 남자는 사다리꼴 종이필터의 접착된 두면을 접어 안쪽으로 왼손 검지를 밀어 넣고는 뾰족한 두 모서리를 오른손 엄지로 눌러 둥글게 만들었다.


- 모카는 에티오피아와 예멘지방의 콩에만 붙이는 명칭이야. 에티오피아는 원산지이고 예멘은 처음으로 커피를 대량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이었거든. 모카는 당시 커피를 수출하던 항구이름에서 유래된 건데, 그 뒤로 재배지가 세계로 퍼져나간 후로도 이 두 지역에서 나는 커피에만 명칭이 남게 된 거지.


접은 필터를 아크릴 드리퍼 위에 올려두고 남자는 선반 위 유리컵 사이에 올려둔 진홍색 밀폐용기를 꺼냈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눈으로 부지런히 남자의 손길을 따라 다녔다.


- 오늘을 위해 한 달을 연습했지. 나름 로스팅포인트를 찾느라 애먹었다니까. 예가체프는 산미로 유명하지만 나는 산미가 거의 사라져갈 때쯤의 고소함이 훨씬 맘에 들어. 좀 더 깊은 맛이 나면서도 깔끔한 맛은 그대로야.


남자가 가져온 용기의 뚜껑을 열자, 마침 유리창을 지나 거울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진갈색 원두가 마치 물을 머금은 조약돌처럼 반짝이고, 금방이라도 씹힐 듯한 고소한 향이 반질거리는 윤기에 실려 탁자위로 흘러내렸다. 두 스푼을 듬뿍 핸드밀에 털어 넣고는 남자가 구리로 된 손잡이를 돌리자 짤그락거리며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음악소리에 흥을 더했다. 힘차게 원을 그리는 남자의 팔뚝의 움직임사이로 퍼져 나온 커피 향이 여자에게로 밀려들었다. 


- 하여튼, 무슨 말을 못해. 어떻게 넌 적당이란 걸 몰라? 근처에 드립커피 먹을 만한 데가 없댔지, 누가 직접 커피까지 볶으래? 정말 못 말려.... 어떻게 볶는 기계까지 덜컥 사냐? 하여간 얘나 어른이나 남자는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갈린 커피가루가 갈색 종이필터로 담기자 더욱 진한 커피향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여자는 말하다 말고 눈을 감고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목덜미로 닿아오는 햇살과 느긋한 보사노바 리듬이 커피 향기에 뒤섞여 뒤통수 근처를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러게.... 그 말 듣고 내가 한번 만들어 봐....라는 생각이 들고부터 글쎄 정신차려보니 이렇게 돼버렸네...


손으로 탁탁- 핸드밀에 남은 커피가루를 털어낸 다음 남자는 주둥이가 뾰족하게 생긴 주전자에 조금 전 끓여둔 물을 옮겨 담았다. 원을 그리듯 조심스레 물을 붓자 김과 함께 커피가루가 호빵처럼 부풀어 오르며 그윽한 커피향을 터트렸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내밀며 탄성을 질렀다.


- 와아~ 제대론데~
- 그치?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커피 케익이 완전히 부풀어 오르는 걸 구경했다. 다시 거품이 내려앉으려 할 때 쯤 남자가 다시 원을 그리며 물을 붓자 드리퍼 아래로 갈색으로 우러난 커피가 본격적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갓 볶았을 땐 더 심했어. 아주 넘칠 정도로 부풀더라고... 하지만 볶고 나서 약간 기름이 배어나올 때쯤이 가장 맘에 들어서 미리 볶아 두었지.


남자는 부풀어 오른 거품이 무너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반복해서 물을 부었고, 다시 턱을 받히고 앉은 여자는 드리퍼 위로 찰듯말듯 흘러내리며 점점 연해지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커피가 차오르자 남자는 드리퍼를 치우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커피 잔에 우러난 커피를 부어 말없이 여자에게로 밀었다. 괴고 있던 손을 빼서 잔을 들어올린 여자가 향을 맡고는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천천히 입안의 커피를 삼킬 때까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여자를 지켜보았다. 여자가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 카페에서 뭐 파는 지도 모르는 걸 데리고 다니며 사람 만들어 놨더니, 이런 호사를 다 누리네.”


다시 트랙은 바뀌어 남자가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탁자 위를 비추던 햇살이 어느새 탁자의 왼쪽 벽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던 그때, 여자의 표정을 바라보던 남자의 다문 입이 한껏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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