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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Feb 10. 2019

[소설] 스토너


책의 후반부를 지나면서 떠오른 소설이 하나 있다.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책을 다 읽은 후에 그것과는 결이 다른, 어쩌면 완전히 반대방향의 질감을 가진 의미로서 '위대한'이란 수사가 '스토너'란 제목에서 느껴졌을 수 있다. 오히려 이 '위대한' 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붙이지 않음으로써 이 생략된 의미는 제목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었다.


'위대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스토너'도 철저하게 '남성적' 시각을 담고 있다. 여기서 '남성적'이라는 단어는 가부장적이라던가 권위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남자가 아무리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이해하려 한들, 그것들에 관해 여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가지는 직접적인 감정이나 태도에 도달하기 힘든 것처럼, 개츠비나 스토너에게서 느끼는 '위대한'이란 표현 역시 남성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어떤 직접적인 감정과 태도를 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성취를 원하지만 그것에 관한 증명은 남녀에 따라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 같다. 그 최종적인 증명이 여성의 경우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확인이라면 남성은 스스로에 대한 확인에 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마 이 소설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여성보다는 남성일 확률이 높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어느 시점, 단순히 개별적인 자아가 아니라 뭔가 인류적이고 우주적인 흐름 속에 놓인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거창하고 신비스러운 직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소박하고 무심한 평안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아늑하고 편안한 설렘, 혹은 어떤 어둠 속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막연하고 흐릿해서 스스로도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기 힘든 감정이겠지만, 그런 순간 인간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이 세상 전부가 투영된 어떤 보편성과 마주친다. 이 역시도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 심상들은 여성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스스로 잉태한다는 사실, 남성에게는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감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처음부터 생명의 신비와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맞닿아 있는 여성의 입장에 비해 남성의 의식은 언제나 혼란스럽고 고독하고 비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캐츠비가 남성의 근본적인 본능이면서도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성취인 한 여성에 대한 집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하는 그 거침없는 무모함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면, 스토너는 그 본능적인 성취에 들러붙은 의무와 그것과 관련된 소외감과 불안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붙들기 위해 보여줬던 지독한 인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위대한'이란 단어를 떠올릴 만큼 경외감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남자들은 주인공 스토너에게서 동질감과 친숙함, 연민과 애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소설은 판타지에 가깝다. 캐서린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예감되었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잠시 이 소설은 굉장히 진부해졌다. 그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스토너뿐만 아니라 소설의 작가,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나 같은 부류의 남성들이 그리는 여성성의 결정을 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견뎌내는 주인공에게, 혹은 그 글을 쓰는 작가 스스로 비정하리만치 냉담한 삶 속에 어떤 꿈같은 위안을 넣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물론 스토너나 작가나 독자에게, 그리고 나 역시도 그녀의 존재로부터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난 그녀의 존재가 약간은 기만이나 위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 나라면 비정하리만치 스토너를 인내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로맥스 교수와의 어떤 결말을 기대했으나 작가는 결국 무심함을 선택했다. 이것이 책을 읽으면서 가진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 역시 작가의 선택이 옳은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을 그와 대립시키고 차이를 분명히 일깨우는 것은 스토너의 스타일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책을 덮으며 그에게서 떠올린 위대함과도 배치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 말랑한 느낌은 지울 순 없다. 스토너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명절 기간 중 가볍게 읽을 장르소설을 찾다가 생뚱맞게 고른 책이었다. 정작 휴일기간엔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가 피로 때문에 누워 뒤척이다 단순에 읽어버렸다. 평소 소설은 거의 읽지 않지만, 이런 소설을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검색해보니 출간 후 50년이 넘어 베스트셀러가 된 기이한 경력을 가진 작품이었다. 아주 우연히 가지게 된 선물 같은 기쁨이랄까. 모처럼 소설에서 느껴본 희열이 즐겁다. 몇 부분 오역으로 느껴지는 어색한 문장이 있었지만 번역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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