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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Sep 06. 2019

신대륙

그 사건을 제외하면 그날도 별다를 것 없이 평범했던 날이었다. 평소보다 약간 늦잠을 잤던, 그래서 서두르다 면도날에 베인 왼쪽 턱밑의 상처가 오전 내내 따끔거렸던 것이 전부였던, 아마 그날 오후 느닷없이 남자가 붙잡혀 버린 감정만 없었더라면, 흔한 지난날처럼 그냥 잊혀졌을 그런 수많은 날들 중 하루였다.


남자는 늘 앉는 카페 입구 바로 맞은편 자리에 있었다. 이따금씩 오후의 햇살은 구름에 숨었다 나오기를 반복할 때마다 테이블에다 반질반질하게 윤을 내고 있었고, 그는 늘 그랬듯이 그 자리에서 책을 펴 들고 전날 메모해 두었던 부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였다.


정말이지 그 사건엔 아무런 이유나 발단이 될 만한 계기가 없었다. 그날뿐 아니라 그 전날도, 그전에 전날도, 그 전주나 그 전달도, 그가 기억하는 한 약간의 심경이나 신상의 변화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의식적 사고는 인과관계를 파악하면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런 게 있건 없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하나의 사실로서 포착된다는 데에 있다. 포착된 사실을 통해 상황은 확정되고, 어떻게 확정되느냐는 그다음 사고나 행동을 결정하는 전제가 된다. 그날의 기억은 바로 이 부분이 문제였다.


남자의 그 강렬했던 인상은 이런 도식적인 추론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럴 경우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해 운명이라든가 기적과 같은 불가해한 근거를 만들어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매사에 원인과 결과를 파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남자의 성향으로는 그것을 불분명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심리상태라는 사실은 남자에게 자신의 알 수 없는 감정과 그것을 해명하려는 이성의 구분조차 힘들게 했다. 그 일로 그는 한동안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사건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마침 햇살이 드는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을 뿐이었다. 살짝 웃음을 띤 여자가 들어오던 그때, 누군가 숨겨둔 조명의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느닷없이 실내가 밝아지면서 뭔가 명암이 분명해지고 사물들이 배경으로부터 선명해지던 그 순간을 남자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막 비쳐 든 햇살 때문일까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단지 햇살이 들었다기엔 너무나 강렬한 경험이었다. 실제로도 남자는 그다음 날 비슷한 시간대에 카페에 들러 그 자리에 앉았지만, 그때의 인상은 기억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주 낯설지만 아늑한 뭔가가 또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뭔가에 유쾌하면서도 아련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의 온몸으로 전해오는 것의 정체가 촉감인지 시각인지, 또는 청각인지도 모를 뭐라 설명하기도 힘든 묘한 경험이었다. 마치 낯섦, 아늑함, 따스함, 부드러움, 유쾌함, 아련함, 이런 것들이 어떤 화학식을 가진 분자들처럼 그녀로부터 순식간에 퍼져 실내를 눈부시도록 채우며, 가구며 바닥이며 벽과 천정을 휘돌아 남자에게로 훅 밀려들었다.


그것들은 어떤 빛을 발한다기 보다는 사물이 원래 가지고 있던 빛깔을 끄집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 빛들과 함께 전해오는 황홀함에 취해 남자는 몸 전체가 나른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풀어져 하염없이 흘러내릴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남자는 점점 더 분명해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영혼이라고 부르는 뭔가의 정체를 처음으로 가늠해보았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남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남자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 명확하면서도 동시에 다가가야 할 미지의 것들로 가득한 어떤 존재가 빛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을 가르며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우아한 움직임이 일으키는 파문들로 넘실거리던 빛들이 이리저리 흩뿌려졌다.


그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 인상의 실체를 분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력했으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인상에 매달려있는 자신의 마음을 떨칠 수도 없었다. 알 수 없는 환희와 슬픔, 난데없는 열망과 무력감이 남자는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그 인상에 빠져들었다가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뺨을 꼬집기도 했다.


며칠 후, 그는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아무런 해명도 없이 다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해진 그 시간, 늘 앉던 그 자리에 남자는 앉아있었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변함없다는 그 사실, 그러니까 그의 일상이 주는 형식과 그 실제 내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남자는 너무나 낯설었다. 그때 그는 아마 그 모든 기억은 사실 꿈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경험은 정신병의 일종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가 봤던 영화의 몇몇 장면들, 느닷없이 환상에 사로잡히는 주인공의 심리는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실제 경험일거라 추측했다.


남자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득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섰다.


다시 빛들로 가득 차고 온몸이 나른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분명함과 불분명함, 환희와 두려움이 다시 한번 그에게 몰아쳤다.


“제가 좀 늦었죠?” 여자는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음료를 주문하러 카운터로 갔다.


저만치 선 여자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다시 이것이 정신병일까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휘감은 이 감정의 정체를 해석하려 그는 애를 썼다.


여자가 다시 다가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가져온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녀는 곧바로 가방에서 복사본을 두 부 꺼냈다. 남자에게 한 부를 건네고 자신도 한부를 펼쳐 보며 지난주 정리하기로 했던 자료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마주한 얼굴, 이 익숙한 얼굴을 그동안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인지 남자는 놀랍기만 했다. 그 모양은 세상의 온갖 의미들, 그동안 그에겐 그저 추상적이거나 무의미한 오해나 무지라고 간주했던 것들을 포함한 형이상학적인 이름들이 형상화된 결정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를 가르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들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가야 할 먼 미래의 발자취를 미리 발견할 것만 같다든지, 옹기종기 모여 줄지어 선 눈썹들과 그로부터 떨어진 몇 가닥의 눈썹들을 보고 있자면 세상의 질서와 무질서의 오묘한 조화가 이해될 것만 같다든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할 때 살며시 내리깔리는 속눈썹들의 움직임들로부터 모든 살아있는 것의 기억들을 되새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든지, 분홍빛 두 볼 사이에 솟아오른 콧마루를 오르다 보면 인간이 왜 꿈을 꾸고 왜 그 꿈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든지, 보드라운 두 입술 사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들로부터 인류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신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다든지 하는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눈동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일렁거리는 검은 수정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시작된 이유인 것처럼 아련히 빛나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 지금껏 남자가 해결되지 못한 숙제들 모두를 줄 세워 대답을 기다리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때때로 그것들이 흔들거리면 주변의 사물들도 그에 반응해 떨리는 듯했다. 그는 이 우주는 어쩌면 저 흔들리는 진동에서 연유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진 은은한 분홍빛의 바다....


“왜 그렇게 멍해요?” 여자가 남자를 노려보았다.


두 개의 검은 수정이 남자를 향했다. 미처 눈길을 피하지 못하고 남자는 가만히 여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 속에 담겨있는, 그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누군가의 얼굴을 발견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 그 깊숙한 우주 속에 유영하듯 잠겨 든 한 남자.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다문 입술로 뭔가를 말하려 했다.


“이상해.... 저번에도 그러더니.”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무라고 있지만 방긋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대신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순간 모든 게 명료해졌다. 그렇다. 저 황홀한 존재가 주는 감동에 해명 따위는 필요 없다. 세상에는 아무런 근거나 이유가 필요치 않는 오직 스스로의 존재에 의해 빛을 발하는 특별함이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는 막 발견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있었고, 그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 훨씬 전부터 이미 닻을 올리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른침을 삼킨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뭔가를 깨달은 거 같아요.” 




# 연 - 이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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