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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Sep 19. 2019

내가 하려는 말은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유리에 하나 둘 빗방울이 선을 그었다. 서로 겹치던 선들이 점점이 뭉치다가 다시 하나둘씩 방울져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미끄러지며 거리의 간판과 조명 불빛들을 문질러 흩트렸다. 주점 안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비가 오는 줄도 몰랐다.


조금씩 가속도가 붙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관성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남자가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모습을 여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힘이 들어가는 눈살이며, 잠시 말끝이 늘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커다란 손이며, 상기된 목소리처럼 생기 넘치는 입술 모양이며, 팔짱을 꼈다 풀었다는 반복하는 두 팔까지, 평소와 달리 들떠 보이는 모습이 여자는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한 생명을 바라보면 말이죠. 음....” 술기운 때문에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사실 ‘론’이란 말은 적당하지 않아요. 뭔가 가정에 불과한 이론이라는 인상을 주니까요. 이건 그저 이론이 아니라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음.... 사실 이것은 설명 가능한 유일한 이해 방식이지만, 일단 여기서는 하나의 이론이라고 해둘게요.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과거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나타난 시점이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단세포 동물 같은 거요?” 여자가 물었다.


“대충 비슷하지만 훨씬 조악한 무언가 겠죠. 아주 보잘것없고 활동도 미미해서 그저 기초적인 대사활동이 전부였을 무언가. 그렇지만 자신을 구성하는 정보를 복제하기 시작한 위대한 첫 번째 생물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최초의 조상이라고 부를만한 원시생물이 어느 시점에 우연히, 어떻게 하나가 생겨났던 거죠.”


“조상요? 딱 하나만 있었다는 말인가요?”


남자는 잠시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남자가 생각을 정리할 때의 버릇이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꼈을 때 여자는 꽤나 당황했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그녀는 태연하게 그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고, 그때 그녀는 금방 그 시선 속에는 남자의 생각이 빠져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빤히 뭔가를 바라보는 동안 그의 생각은 눈앞을 떠나 머릿속 어딘가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여자는 그가 검지를 펴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제 곧 남자는 말을 이을 것이다.


“우연히 생긴다는 게, 이게 뭐, 여기저기 마구 이렇게 생겨난 게 아니고, 정말 특별한 조건들이 수없이 겹치고 겹쳐서, 좀처럼 생길 것 같지 않은 우연 하나가 생겨난 거란 말이에요.” 남자는 말하면서 손바닥을 서로 마주 보게 펼쳐 리드미컬하게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원시 지구의 환경을 재현하면 아주 쉽게 유기물의 합성을 확인할 수 있지만, 복제능력을 가진 유기물. 그러니까,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건 그런 경험적인 방식으로 확인될만한 게 아니거든요. 그저 그런 우연의 차원을 넘어선 검증하기 힘든 사건인 거죠. 그건 우리가 가늠하기 힘든 시간의 궤적을 상상할 수 있을 때에만 경우의 수를 가정할 수 있는 논리적 추론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그런 조건들이 갖춰지면 필연적인 일이기도 하죠.” 남자가 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여자가 남자의 잔을 채워주었다. “당첨자가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데 나의 경험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복권 같은 느낌이군요.”


“오... 재미난 비유군요. 그런 거죠. 그런 일이 수없이 겹쳐진 우연이란 거죠. 무한이란 시간을 전제해야만 겨우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남자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과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것이 이미 실현된 가능성이란 증거거든요. 아주 놀랍고도 특별한 가능성.” 마지막 말에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가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서로 눈 앞에 보이는 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같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팔꿈치에 기대 나란히 테이블에 몸을 기울인 채 비 내리는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식당의 차양막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부서지며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고개를 그대로 고정한 채 남자가 말했다. “제각기 생겨난 생명들이 만나서 수많은 생물들로 퍼져나간 게 아니라, 정말 기적같이 생긴 하나가 분열을 해서 생기고 또 생겨서 지금의 모든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이런 가정과 논리를 두고 보자면 아주 놀라운 사실 하나가 도출돼요. 이건 형식적으론 정말 단순하지만 내용적으론 감동적이죠.” 말끝에 남자가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느꼈지만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형식적으론 단순하지만 내용적으론 감동적이다....” 그녀는 남자의 말을 중얼거리듯 되씹었다.  비 내리는 걸 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표정과 감정이 눈앞에 그려질 듯 느껴졌다.


남자가 창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건의 당사자란 뜻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기까지 하죠. 이게 뭘 말하는지 아시겠어요?”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건 바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결국 단 하나의 복제 정보로부터 전부 분화되었다는 걸 뜻한다는 거죠. 수천만 년 동안!” 남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여자도 남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남자의 흥미진진한 표정이 파도처럼 넘쳐오는 것을 여자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겠군요.... 정말 단순한 추측인데 놀라운 일이군요. 어쩜..... 이 모두가....” 그녀가 가게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죠? 정말 놀라운 일이죠.” 남자가 특유의 넉살 좋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모든 만남이란 건 말이죠, 아주 우연히 싹튼 생명 하나가 그 자신의 분신들을 맹목적으로 마구 퍼트리고, 그래서 그렇게 흩어진 생명들이 그 긴 세월 동안 제각기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견디며 살아와가지고, 어느 날 극적으로 다시 만난 거란 거죠. 이건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뭉클한 기분이에요.”


“세상에.... 뭔가 묘한 기분이 들게 하네요.” 여자는 남자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반짝임을 보고 있노라면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지곤 했다.


남자는 좀 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이죠..... 만났다는 바로 그 사실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동일한 기원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던져진 이 세상이란 혼란 속에서. 다행히 어떻게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그 유전자가 또 그런 혼란 속에서 적응해가며 계속해서 남겨지고 남겨져 쭉 이어져오다가, 어느 날 벌어진 놀라운 사건이란 거죠, 만남이란 게.” 남자는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두드리며 소리를 높였다. “언제? 같은 시간에! 어디서? 같은 장소에서! 푸하하....” 또박또박 단어들에 힘을 주어 말하던 남자가 호쾌하지만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그냥 지나친 것도 아니고, 글쎄 하필이면 만나 가지고! 하하.... 만약에 하나라도 백 년 전에 태어났거나 또 백 년 후에 태어났으면 서로 옷깃을 스칠 가능성조차 제로인 거잖아요.”


여자는 그때 남자의 표정이 이제 막 소풍에서 돌아온, 머릿속에 가득 찬 이야기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촌 조카의 표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남자의 표정이 좋았다. 내가 좋아한다는 걸 당신은 알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만난 생명이란 건 정말 아주 아주 신비롭고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거죠. 아까 우주를 신비롭다고 그랬죠? 그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함과 그 요소들 사이의 정교한 움직임들....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뿐이잖아요. 그것들은 아무리 복잡해도 현재 우리가 아는 지식을 가지고 수식을 통해 아주 정확히 설명해 낼 수 있어요. 물론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 존재하겠지만, 그건 기껏해야 우리가 그 관계들의 변수와 상수들을 어느 정도까지 고려할 것인가에 관한 적용의 문제일 뿐이란 거죠. 하지만 생명들의 만남이란 달라요. 비록 물리적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지의 명령에, 이 역시도 단지 물리 화학적인 작용에 기초를 둔 기계적 본능이라 하더라도, 매 순간순간 반응하는 감정이라는 임의성의 지배를 받고 있죠. 어쩌면 이 자유로운 임의성이야말로 한 개체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특질일지도 몰라요.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우리는 생명에 관한 한 그 경향성을 파악할 뿐이지 사물들처럼 결코 확정성에 도달할 수 없거든요. 뭐, 사물도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인간의 신체적 감각 내에서는 말이죠.” 남자가 경쾌한 동작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여자도 잔을 들었다. 잔을 부딪힌 두 사람은 잔을 기울이고 다시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층 거세진 빗줄기가 보도블록 위로 부서지며 마치 물안개가 피어오른 것처럼 부옇게 깔렸다. 마침 가게 안을 채우던 음악이 조용한 곡으로 바뀌고 그 사이를 빗소리가 은은하게 메웠다.


들려오는 빗소리를 가늠하며 여자가 말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란 건 대체가 불가능한 것이고 때문에 각각이 고유한 것이고 때문에 신비로우면서도 소중한 것일 테죠.” 남자와 함께 앉은 이 자리가 감동스러울 만큼 새로웠다. 한결 부드러워진 남자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무엇보다 사물들이 아무리 조화롭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단지 물리적인 특징과 움직임으로 설명될 뿐이지만, 생명들은 거기에다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잖아요. 아...” 남자에게서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걸 뭐라 해야 할지.... 경이롭다는 단어 정도로는 한참이나 부족해요.”


이때부터 여자는 남자의 말끝이 유난히 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울림은 마치 말소리와는 별개로 남자의 몸으로부터 직접 여자의 몸으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목소리가 좋았다.


남자는 차분히 목소리를 눌러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만난 이름 모를 고양이의 눈빛 속에서도 이미 이 사실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는지 몰라요. 어느 순간 길모퉁이에서 눈에 띈 한 송이 들꽃이나 햇살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들에게서도 말이죠. 그러니까....” 그가 말을 하려다 망설였다. 


남자는 잠시 뚫어져라 여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때 그는 습관처럼 생각에 빠져있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여전히 눈빛 속에 머물러 있다는 걸 여자는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다시 말할 때까지 여자는 가만히 기다렸다. 머뭇거리는 입술과 달리 남자의 눈은 한층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을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남자의 눈동자는 줄 곳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말이죠. 지금 우리 만남이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서 느끼는 감정들.... 어쩌면 당신도 알아차렸을지 모를 그 감정들,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피어난 새로운 감정들, 그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쇄반응들.... 이 특별한 사건이 만든 이 특별한 감정을..... 난 지금 당신에게 이걸 말하려는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별별별 - 이성경&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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