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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Oct 06. 2019

불을 지키는 사람

어두운 방,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의자의 팔걸이에 걸쳐져 비스듬히 세워진 한쪽 팔에는 삼분의 일쯤 뒤로 접힌 문고판 책이 들려있었고, 작은 나무 침대장에 놓인 청동제 접이식 스탠드 불빛이 막 넘긴 한 페이지를 노랗게 밝히고 있었다. 까만 밤하늘 아래로 점점이 멀어지는 창밖의 도시는 고요했다. 창문의 한쪽 벽으로 가로놓인 침대 위로 여자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지런한 여자의 숨소리, 조심스레 넘겨지는 페이지 소리, 그때마다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팔걸이 소리와 함께 이따금 웅웅 거리는 보일러 소리가 벽체를 타고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책을 반대편 손으로 옮기고 얼마 있지 않아 여자의 뒤척임이 들려왔다. 남자는 책을 내려놓고 여자를 지켜보았다. 베개에 한쪽 볼을 파묻은 여자의 얼굴은 까만 머리카락에 가려져 한쪽 눈과 콧등만 보였다. 남자는 길다란 속눈썹 위로 무성히 드리운 눈썹과 부드럽게 솟은 콧등 아래로 얌전히 다물었을 그녀의 입술 모양을 가늠해 보았다. 오래지 않아 여자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어때 좀 괜찮아?”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이불속의 손을 남자에게로 뻗었다. 남자는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아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가 한껏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나 때문에 휴일을 망쳤네.” 남자가 그녀 입가의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여자가 입술을 내밀었다. 남자는 입을 맞추고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침 휴일에 딱 맞춰서 이렇게 아프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주 이쁜 짓을 한 거야.” 남자가 말했다.


“놀리는 거  아니지?” 여자가 눈을 감은 채로 힘없이 대꾸했다.


“저질 체력인걸 알면서도 어떻게 매번 그렇게 무리한 계획을 짜니. 네가 지난주부터 들뜨기 시작했을 때부터 불안불안 하더라.”


“그래서 내가 싫어?”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 뒤로 살짝 웃음이 맴돌았다.


“어이그....” 남자가 부드럽게 여자의 볼을 꼬집었다. “우리 아가씨가 이제 좀 살만한가 보네. 그래도 이렇게 느긋하게 아플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남자가 볼을 쓰다듬자 여자는 살짝 고개를 추켜올리며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부벼댔다. 그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의 한쪽 다리를 머리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고마워. 가끔 나도 날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오빠랑 뭘 하려고 생각만 하면, 자꾸 나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게 되는걸. 정말 바보 같아.” 여자의 머리는 남자의 다리에 매미처럼 가만히 붙어있었다.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너무 시간이 아까워서 더 많은 걸 함께 하고 싶었나 봐. 매번 힘들어서 정작 짜 놓은 계획은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면서....”


남자는 물끄러미 여자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원래 여행이란 건 계획하고 준비하는 게 재미의 반이잖아. 일단 반은 됐고 나머지 반도 충분히 즐거웠어. 이제 휴식을 취할 일만 남았고 아직 충분한 시간도 있으니, 이만하면 꽤 훌륭한 마무리야. 게다가 넌,” 여자의 얼굴을 내려 보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뭔가에 자신을 혹사시킬 정도로 매달려야 할 게 필요한 사람이잖아. 대충이면 아주 곤란하지.” 남자가 여자의 가슴팍을 누르며 말했다. “여기 에너지가 가득해서 가끔씩 발산하지 못하면 우울해지잖아.”


여자가 키득거렸다. “벌써 예전에 간파당했지. 난 너무 쉬운 여잔가봐.”


“뻔하긴.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게 있지. 늘 새로워.” 남자도 피식거렸다.


“나한테 왜 잘해? 나라면 짜증 날 거 같은데.” 불쑥 여자가 물었다.


“넌 왜 그렇게 날 좋아하니? 나도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남자가 되물었다.


“피장파장인가? 아.... 뭔가 이상한 커플이네.”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을 찾아 꼼지락거렸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사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를 완전히 안다는 것만큼 확실한 만용도 없을걸. 평생을 두고서도 절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잖아. 다만 난 최선을 다해 널 알고 싶은 것뿐이야.”


“정말?” 여자가 물었다.


“정말.” 남자가 답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오빠를 모르겠어.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아직도 날 좋아한다는 게 믿기질 않아.”


남자가 말했다. “나도 가끔 믿기질 않아. 내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말야. 이건 순전히 네 탓이지.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감정을 모르고 살았을 걸.”


“그런 낯 뜨거운 소리를 어쩜 이렇게 표정도 하나 안 변하고 말을 할까....” 여자가 손을 뻗어 올려 남자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말야. 이것도 다 네 탓이지.” 남자가 말했다. “참 이해하기 힘들었어. 신이든 사랑이든 어떤 믿음에 자신을 내던져 뭔가를 갈망하고,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 맹목적인 열망 같은 거 말이야. 굉장히 어리 석어 보였거든.” 남자의 손이 여자의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얼마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면 그런 근거도 없는 것들에 매달리려는 걸까. 그건 그저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들, 그로 인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처럼 보였던 거지.”


“맞아, 확실히 좀 재수 없는 사람이긴 했지.”


“맞아, 맞아. 그만큼 난 철없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어.”


“그렇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오빠가 종교든 뭐든 뭔가에 의지할 사람은 아니잖아. 사랑에 인생을 걸 타입도 아니고. 이 때문일 거야. 내가 오빠를 만나는 것이 뭔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지점은.” 여자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렇지. 그건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그런 나의 시각이 굉장히 편협한 시각이었다는 거지.” 남자는 여전히 여자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가 방긋 웃고는 잠깐 바라보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누워계시네. 내가 사는 세계의 주인. 이 특별한 존재가 나 스스로에게만 안주할 수 없게 만들어. 나로 하여금 더 분발하게 해. 부족함을 일깨우지만 부끄러움이 아니라 기꺼이 더 멀리 나아가기를 갈망하게 하지. 네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겨. 글쎄.... 보통 욕망이란 불행을 키우는 영양분이기 쉽지만, 이 욕망은, 그러니까 내가 널 볼 때마다 어떤 확인하지 못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니.” 남자가 몸을 숙여 여자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걸. 비현실적이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야. 내가 정말 어울리는 사람인 걸까. 오늘 난 왜 좀 더 현명하지 못했던 걸까. 오빠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큼 난 가치가 있는 걸까 하는 이런 생각들. 이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이건.... 아마 내가 오빠에게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으면 하는 조바심 때문인 것 같아.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짜증스럽기도 해.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나의 감정이 사라질까봐 두렵기도 해. 이런 감정이 내 하루하루를 절실하게 만들어주거든.”


“걱정 마. 넌 언제까지나 그럴 거야. 넌 결코 꺼질 수 없는 불을 가진 여자니까.” 남자가 여자의 콧등을 툭 건드렸다.


“그럼 오빠는?”


“난 불을 지키는 남자지.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 무지 노력해왔어. 난 불씨를 지키는 전문가고.”


“뭐래. 크큭... ” 여자가 잠긴 목으로 웃음을 터트리다 기침을 했다.


“물 데워줄까?”


“응.”


주방에서 데워온 물을 여자가 마시자 남자가 여자를 안아 다시 침대에 반듯하게 눕혔다.


“자장가 불러줘.” 여자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남자가 살며시 여자의 머리를 들어 올려 팔베개를 하고 눕자, 여자가 몸을 돌려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남자는 곧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는 이 한밤....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에 잠이든 여자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여자가 잠이 들고도 한참을 등을 토닥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른 달은 어느새 건물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흐릿한 밤하늘엔 구름들만 남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도시의 불빛이 부옇게 번진 구름들 사이로 불빛을 깜박이며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남자는 문득 오래전 그녀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뭔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해 보였던 처음 본 그 눈빛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지자, 남자는 지금 이렇게 여자와 한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비행기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의자에 올려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책을 붙잡고 읽다만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여자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품속에서 천천히 피어올라 밤하늘로 흘러들었다. *



# Les Jours Tranquilles - Andre Ga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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