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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Aug 03. 2016

유치한 사랑의 노래 (7)

잘한 일


여자는 발갛게 술이 오른 얼굴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는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사실은.... 난 널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아했었어. 
- 뭐.... 나빠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지. 나도 네가 좋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가 말을 던지며 치즈조각을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자는 여전히 민망한 표정으로 수줍게 말을 이었다.


-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좋아했었다고.... 처음부터 남자로.
- 에이~ 확인 할 수 없다고 막 던지는 거야? 


남자가 팔꿈치로 여자를 툭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여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뭐야! 그 불량한 태도는?


여자의 말투에 흠칫 놀랐지만 남자는 여전히 장난스런 표정이었다.


- 왜 이리 심각해?
- ....  


여자가 말없이 남자를 노려보자, 자세를 고쳐앉은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 음.... 인간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일수록 그것에 관한 기억들을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비트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지금 날 좋아한다는 건 충분히 알겠는데 그래서 넌 평범했던 기억들까지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그저 호감정도였던 감정이 덧씌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운명이니 하면서 스스로 도취되는 거라고. 

- 하여튼... 이상한 대목에서 분위기를 깬다니까.


여자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리자 뭔가 점점 의도치 않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걸 깨달은 남자가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여자의 등을 어루만졌다.


- 어...! 삐지려고 그런다. 넌 취하면 좀 과잉감정이잖아. 난 그냥...
- 닥쳐! 니가 날 알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냐고?
- .....


남자의 말을 끊으며 파고드는 여자의 외침에 남자는 손을 거두고 말없이 여자를 바라봤다. 이럴 땐 가만히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최선이라는 걸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 내가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널 좋아했었다고, 알아? 알 리가 없지. 둔해가지고는...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아냐고? 미희하고 수진이 만나거든 물어보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속상해가지고 술을 얼마나 마시고.... 토하고.... 나쁜 년들.... 이건 안 된다고 포기하라고.... 너는 관심도 없을 거라고.... 어? 그래도 넌 알았어야지! 어떻게 내 맘을 그렇게 모를 수 있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었냐고? 이 나쁜 놈아.... 


남자의 팔뚝을 두드리는 여자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들고 있었다. 놀란 남자가 다시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지금 울어? 왜 그래?
- 그래 운다. 그때 생각하니까 서러워서 운다고! 흑~ 넌 정말 반성해야 돼!


여자가 눈물을 훔치며 서러운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남자는 말없이 여자의 등을 두드리며 여자의 울먹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여자가 휴지로 눈물을 눌러 말끔히 닦아내고는 핸드폰으로 자신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하자 남자가 자신의 의자로 몸을 돌리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으이그.... 이 아가씨야. 누가 들으면 네가 나 좋다고 한참이나 쫓아다닌 줄 알겠네. 같이 밥 먹을 기회가 있어도 술 약속 있다고 빼고, 딴 사람이랑은 농담도 잘하더니 나한테만 따지고 냉랭하게 대했던 건 누구였더라?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고백한 건 누구였지? 기껏 고백했더니 당황스럽다고는 일주일이나 연락도 안 되던 사람은? 휴.... 그 끔찍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네....

- 원래 여자는 쉽게 허락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여자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남아있던 술잔을 한입에 비우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 참... 자기가 고백해서 만나기라도 했으면 날 잡아먹으려 했을 거야.
- 그게 다 내가 꼬리를 쳐 놓아서 그런 거라고....


다소 민망한 표정이긴 하지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여자가 대답하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 꼬리 좋아하시네! 너처럼 꼬리쳤다간 다들 좋아하다가도 좌절해서 포기한다고. 나 정도 되니까 그걸 극복하고 고백한 거란 말이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랬겠니?  


잠깐 남자의 말을 되새겨보더니 여자가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잘했어. 그건 인정해줄게.


기가 막힌다는 듯이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가 잔을 들었다가 빈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들어 카페 종업원을 찾았다.


- 술이 다 깨네. 난 한잔 더 시킬 거야.
- 나도!


여자도 남은 술을 들이키며 남자의 팔을 붙잡았지만, 남자는 눈에 힘을 주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어허! 또 무슨 주정을 부리려고.


간절한 눈빛으로 남자의 팔을 흔드는 여자의 목소리엔 잔뜩 콧소리가 배어있었다. 


- 내가 주정해서 싫어?
- 아니, 너무너무 좋아.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며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여자가 방긋 웃으며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 그럼 나도 한잔.


여자가 방긋 웃으며 남자의 팔에 매달렸지만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금방 단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안 돼!


그리고는 다가오는 종업원을 향해 자신의 잔을 가리키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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