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여행 DAY 4
강원도 여행 4일 차
양양/강릉 일정_ 2.
- 오죽헌
- 엄지네 포장마차 (저녁)
- 강릉 빵다방 (인절미 빵)
- 경포호
- 파란바다 펜션 (체크인)
- 경포해변(밤바다)
카페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마친 후, 우리는 3천 원의 입장료를 내고 오죽헌에 입장했다. 눈도 못 뜨도록 내리쬐는 뙤약볕에 땀이 뒷목을 다 적셨지만 그토록 오고 싶었던 오죽헌인지라 무척 신 나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에도 여행객은 많았고 아이들은 더위도 모르고 붉은색 벽돌 바닥을 힘차게 뛰어다녔다.
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좋은 말이다, 라는 생각 뒤로 홀로 놀랐던 점은 이득을 '본다'라고 할 때 '볼 견'자를 쓴다는 정도. 그리고 동상 아래 쓰인 '율곡 이이'라는 한글이 참 정직하다는 점.
조금 더 걸어가니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에 대한 안내판이 보였다. **사임당의 그림은 숙종대왕이 감탄할 정도로 그 솜씨가 대단했다고 한다. 특히 오죽헌에는 초충도의 주요 소재인 오이, 수박, 가지 등을 심은 화단을 조성해두었는데 급한 발걸음에 ***찾아가 보진 못했다.
*초충도 :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 서양의 17세기 정물화(Still life)에서도 과일 혹은 꽃을 그림에서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나 벌, 파리를 곧잘 발견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그림을 발견할 때면 이 곤충들은 왜 여기 있을까 꽤나 궁금했던 적이 많다. 파리가 꼬일 만큼 향이 좋았단 뜻일까, 아니면 그저 그림 그리던 중 날아온 곤충 친구들을 그려준 것일까. 예술 전문가들의 정물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림 의도는 화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나에게는 정물화에 나타나는 곤충의 존재가 여전히 미스터리일 뿐이다.
** 오죽헌/시립박물관 사이트 참고.
***사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오죽헌은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낙산사를 너무 열심히 탐구한 덕분에 다리가 아파 조금 빨리 돌아다녔다. 가지 못해 아쉬웠던 곳으로 '강릉 생태저류지'를 꼽는다. 오죽헌 바로 앞에 있는데 노란색 유채 꽃밭을 눈앞에 두고 버스를 타려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넓은 공간을 지나니 '자경문'이 나타났다. 자경문을 지나면 오죽헌이 나올까 했는데 저 멀리 끝에는 '율곡기념관'이 보였고 오른쪽으로 무척 높은 계단 위에 드디어 오죽헌으로 통하는 입구 너머 '문성사'가 작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죽헌은 왜 오죽헌일까?
오죽헌은 오죽이 있는 집이라 하여 오죽헌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오죽헌은 집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호'였다고 한다. 이 '어떤 사람'은 바로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의 다섯째 딸의 권처균인데, *그는 외할머니에게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물려받게 되었으며, 기와집 주변에 검은 대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렇듯 집주인의 호가 언젠부턴가 집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 오죽헌/시립박물관 사이트 참고.
** 논밭
하지만 보물 제 165 '강릉 오죽헌'을 설명하는 안내판은 오죽헌이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그의 아들 최응현에서 외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 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라고 하는데, 아마 그 과정에서 용인 이씨가 오죽헌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날 수 있었지 싶다.
어쨌든 걸어 다닐 때는 그런 의문 따위 안 품고 그냥 돌아다녔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지녔다.
* 문성사 안내판 참고
**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 (네이버 두산백과 참고)
문성사를 장식한 말 중에 와 닿았던 문장을 이곳에 담아본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를 힘써야 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학문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소견이 어두워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었다. 학문에 임하는 사람은 누구나 뜻을 세워 자기도 성인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꾸준히 정진할 것이니라.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두 번째 글귀에서 강요하는 것은 '학문에 힘써라'도 있지만 아마 '뜻을 세워 (...) 마음으로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꾸준히 정진'하라는 것 아닐까. 쉬는 것이 불안해 서두르다 몸 망가지기 십상인 현대인에게 참 필요한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고전을 읽으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문성사를 지나 문을 통과하니 안채와 바깥채가 나왔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 들어는 봤지만 잘 알지 못하는 위인이다**. 괜히 바깥채와 안채에 대한 설명은 적다고 내 빈약한 지식보단 설명문의 부재를 탓해봤다.
*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 또한 한옥의 곳곳을 칭할 때 이곳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니 속이 답답할 뿐이다. 조만간 광화문 교보문고 좀 가봐야겠다.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공간이었구나, 공간의 첫 감상을 그랬다. 여행지에서 고옥을 구경할 때면 내부 구석에 쌓인 먼지가 마음에 걸렸다. 흐른 세월 때문이 아니라 관리 소홀로 인해 가옥에서 풍기는 허름한 느낌. 그게 무척 안타까웠는데 오죽헌은 참 멀끔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두 굴뚝 사이의 크기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서양식 주택과 달리 굴뚝이 많이 있는 것은 나뉜 방마다 불을 떼야했기 때문일까. 아궁이와 굴뚝을 보니 예전 고모집이 떠올랐다. 방충망은커녕 벅도 없이 뻥 뚫린 거실과 밥 할 때 아궁이 아래로 불 붙인 신문지를 집어던지던 고모. 겨울이 가까운 가을이면 마당 끝에 자리한 넓은 양지의 흙을 삽으로 파 김장 김치 담은 장독대를 묻곤 했다. 언젠가부터 뜨문뜨문 고모네 시골집을 찾아갈 때면 지붕을 장식했던 기와가 하나둘 팔려나갔다. 그 위를 파란색 플라스틱이, 그리고 다시 시멘트가 채울 때까지 나는 까만색 기와가 그리웠다.
비 오는 날이면 빗물을 똑똑 떨어뜨렸던 처마가 좋았다. 운수 안 좋은 날이면 잘못 얹어 둔 기왓장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처마의 뾰족뾰족한 모양새가 좋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한옥을, 고궁을 볼 때면 처마 아래에 들어가 고개를 빼놓고 하늘을 쳐다본다.
안채와 바깥채를 떠나 오른쪽으로 향하면 어제각이 나온다. 어제각은 율곡 이이가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오죽헌에 『격몽요결』과 이를 쓸 때 선생이 사용한 벼루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이 이를 잘 보관하라고 하여 지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어제각을 본 후 길을 빠져나오면 오른쪽에 율곡기념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오죽헌 소장유물에 이창용 전 서울대 교수가 기증한 유물을 더한 신사임당, 율곡 이이, 옥산 이우, 이매창, 고산 황기로의 작품과 이우 후손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2012년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두통을 유발하는 냄새 때문에 나는 얼마 있지 않아 나왔다. 이 초충도를 디지털화한 것만은 보고 싶었는데 이후 여행 일정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율곡 기념관을 빠져나왔다.
* 오죽헌/시립 박물관 참고
아침에 속초에서 만석 닭강정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고, 점심으론 양양에서 물회를 먹은 후 다시 시市를 옮겨 강릉을 돌아다녔더니 허기가 졌다. 당장이라도 뭔가 뜯어먹고 싶었지만 오늘의 저녁을 무척 기대했기에 황급히 버스에 올라탔다.
명성이 워낙 자자했던지라 1시간 웨이팅, 혹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포장까지도 생각했지만, 아주 운 좋게도 우리는 5분 정도 기다린 후 바로 착석할 수 있었다-그 이후로는 늦게 온 사람들이 대기를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여행지의 맛집은 유명세 때문에 맛이 변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곳은 진짜였다. 물론 배가 고팠던 것도 한 몫했지만 가능하다면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다.
"여기 근처에 빵다방 있는데."
빵순이 친구가 속초에 도착한 순간부터 먹고 싶다고 말했단 빵가게가 근처에 있다고 한다. 가서 사 먹으면 그만이지만 가게 오픈이 12시인데 마감이 2시라고 한다, 빵이 너무 잘 팔려서. 이때가 거의 7시였을까. 친구의 아쉬운 마음이라도 달래고자 가게에 갔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원래 빵이 빨리 나가는데, 심지어 주말이라서. 오늘은 다 판 줄 알았는데 아이스 팩 아래에 몇 개가 남아있더라고요. 지금 막 꺼내놓은 거예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이런 운수 좋은 녀석. 빵집 인기 메뉴라는 인절미 크림빵 6개와 바게트 빵 1개가 가판대에 남아있었다. 여행 중에 가장 기쁜 미소를 보인 친구는 내게 묻지도 않고 바게트 빵 하나와 크림빵 세 개를 짊어지곤 나에게 남은 인절미 크림빵 세 개를 넘겼다. 세 개 살 생각도 없었는데 얼떨결에 9천 원을 결재해버린 내 손에는 봉지가 달려있었다.
그렇게 한 손에는 캐리어, 다른 한 손에는 봉지를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차로 대략 1시간쯤 걸리는 경포호 근처 숙소를 향해 버스가 출발했다. 지나가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넋 놓고 있는데 아쉬운 마음 한가득이었다. 저기 가고 싶다, 저기도 가보고 싶다! 마음이 굴뚝같은데 촉박한 시간이 미웠다.
원래는 숙소로 바로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이 멋진 풍경을 두고 숙소에 곧장 갈 수 없었다. 노을이 호수 끝에 달려 있는 것은 한순간일 텐데,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다신 볼 수 없을 테니 바로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우리 여기 하루밖에 안 있을까."
다음에는 같은 코스로 일주일은 잡아야겠다.
땅콩집을 연상시키는 방에 짐을 던져 놓으며 일단 누웠다. 위로 뾰족하게 솟은 세모 모양의 천장이 낮아서 허리를 살짝 낮추고 다녀야 했지만 둘이 머물기엔 충분했다. 밤에 덮칠 모기의 습격이 조금 두렵긴 했지만 당장은 바닥에 누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
경포 해변, 볼까 말까?
강릉에 왔는데 경포 해변이 일정에 없어. 심지어 그 좋아하는 카페가 도로를 따라 깔린 카페 거리도 못 가.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픈 다리를 이끌고 경포 해변으로 향했다.
밤의 바다를 본 적 있다. 현란한 불빛 반짝거리는 부산 해운대 바다에서 친구들과 맥주 한 잔 마셔본 적 있다. 하지만 강릉의 바다는 뭐랄까,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마치 화성에 잘못 내린 지구인 하나가 알고 보니 우주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외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빠져나간 바닷물이 파놓은 구덩이로 폴짝 뛰어내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밤바다는 좋다기보단 섬뜩했다. 오전에 햇빛을 받을 때는 그리도 푸르게 반짝거리던 바닷물이, 그 물결 아래의 모든 생명체는 시꺼멓게 묻어놓은 채 홀로 모래를 삼키듯 철렁거렸다.
밤바다는 되게 무섭다.
멀리서 사진 찍고 있는 친구에게 소감을 표출했다. 그럼에도 검은색 캔버스를 적시는 밤 바닷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강원도 여행은 이제 2번이면 끝이 나겠네요. 다음 게시글로는 <책은 홀로_오.>로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