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평론
일방의 현저히 명백한 잘못에서 비롯된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관계의 파국에 있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자기의 입장만을 옹호하는 고집과 상대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는 용기의 부족일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상대에게 굴종하는 비굴함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사과의 말을 건네는 행동에 용기까지 있어야 하는 인식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점을 차치하고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건강한 인간 관계의 구축과 유지의 고민에 명쾌한 해답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용서를 구하려 나설 수 있는 "용기"는 상대에게 진실되고 깊은 위로를 가져다 주게 된다는 해답. 이것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이야기를 살펴 본다.
1.모호함
영화「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 중에 하나는 모호함일 것이다. 우선 등장인물의 직업이 모호하다. —영화 정보에 대해 검색하지 않았음을 가정한다.— 주인공 볼코노고프 대위를 비롯해 동종 직업에 근무하는 것으로 추론되는 모든 인물들의 복장과 상주하는 건물만을 고려하면 이들의 직업을 알기가 어렵다. 영화 초반부 볼코노고프 대위와 친구인 베레텐니코프와의 대화 중 잠깐 등장하는 부분에서 비밀경찰이라는 직업을 알 수 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면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등 명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오로지 추론에 기댈 수밖에 없다.
또한 제목에서 언급되는 볼코노고프 대위의 탈영 행위의 원인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탈영 이후 볼코노고프 대위의 대사를 통해 피해자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동시에 볼코노고프 대위는 영화 최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는 용서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한 상태인 것이 표정을 비롯한 상황과 연기에서 드러난다. 볼코노고프 대위의 결심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상급자의 자살과 동료 조직원들을 차례로 소환하는 "재심문" 또한 각각의 짧은 신(scene)으로만 전달되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이 볼코노고프 대위로 하여금 국가와 신념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게 만들 정도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된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마지막으로 모호한 것은 용서의 목적과 이유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 다양한 피해자의 가족이 등장하고 볼코노고프 대위의 대사를 통해 피해자가 무엇 때문에 탄압받고 고문 받은 끝에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는 상당 부분 자세하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이 설명 이후 볼코노고프 대위가 용서를 구하는 장면에서 정작 대위의 표정과 감정과 상황을 살펴보면 대위 본인은 정확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은 피해자 가족을 만나러 다니는 중 마주하게 되는 피해자의 유품을 태우고 있는 어린 딸의 대사에서 더 자세히 그려진다.
2.용서
볼코노코프 대위의 탈영으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인 베레텐니코프는 잔혹한 고문 끝에 처형 당하게 된다. 부랑자로 도망 다니던 대위는 시체를 매장하는 일에 우연히 강제로 동원되고 그 속에서 친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시체가 매장되고 난 후 이어지는 신(scene)은 대위의 상상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땅속에서 기어 나온 친구는 대위에게 혼자 도망갔음을 질타하면서 단 한 명에게서라도 용서받지 못한다면 끝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 저주한다. 사망한 친구의 시체를 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힌 대위의 무의식 속에서 고통스러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나 아렌트의 저서『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저자가 주목한 악의 평범성에 근거해 대위의 행동을 살펴보면 본인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마침내 스스로의 행동이 악행이었음을 깨달아 예측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동의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옳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대위의 행동에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앞서 지적했듯, 대위의 용서를 구하는 행동에 진정성이 담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도 독일 정부에서 나치에 부역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을 추적해 생존해 있다면 어떻게든 법정에 세우는 것과,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이후 독일 총리의 유태인 희생자에 대한 계속되는 공식 사과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대위의 행동에서 진정성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또 하나의 의문점은 용서의 주체는 누가 돼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 중반부, 피해자를 고문하고 억지 자백을 강요한 대위의 상급자와 별다른 의심 없이 교육을 받은 대위의 대화를 통해 피해자의 무고함과 대숙청을 통해 독재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지배층의 욕심이 자세하게 서술된다. 즉, 모든 피해자는 어떠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혈통, 직업 등 일견 권력계층에 반할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문을 통해 억지 자백을 하고 처형 당한다. 사과는 누가 해야 하며 용서는 누가 해야만 하는가.
영화의 경계를 인류 역사로 확장하면, 대위의 용서를 구하는 방황을 통해 구소련 현 러시아의 공식적인 사과가 부재한 끝나지 않는 독재를 감독이 비판하고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행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과 일본 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독재와 민주주의 혁명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용서란 잘못된 행위의 진실된 주체가 직접 전하는 사과 없이는 절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로가 어울려 살아가는 각자의 매일이 담긴 컵을 들어 영화 위에 부어보면 마찬가지의 결론이 도출됨을 볼 수 있다. 십 대 시절의 학창 생활과 그 이후의 대학 생활 혹은 사회 생활을 몸소 겪으며 우리가 맺게 되는 관계를 살펴보자. 관계의 단절에 부자연스러운 요인이 작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를테면 서로간의 다툼이나 일방의 실수 혹은 잘못이 관계의 존속성을 증발시킨 촉매제였다면, 자문해야할 것이다. 먼저 나서 사과의 손길을 건넸는지 말이다.
3.위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피해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감하는 위로이다. 위로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이어져야 하고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전적으로 피해자의 선택에 맡겨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극 중 신애(전도연 扮)가 겪는 극심한 좌절과 절망이 진정한 위로와 진심 어린 용서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볼코노코프 대위의 방문을 받은 모든 피해자 가족은 용서를 구하는 대위의 요청에 저마다 다른 대답을 보여주지만 그 저변에 깔린 감정은 절대 긍정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저주를 하고 어떤 이는 자살을 하고 어떤 이는 대위의 어리숙함을 비웃고 어떤 이는 의심한다. 대위의 방문 전까지 피해자의 가족은 피해자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과 그로 인해 피해자가 처형 당했음을 피해자의 가족은 처음 들었기 때문에 대위의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용인될 수 없다. 가정하자면 대위는 사정을 설명한 후 사과를 했어야 마땅하다. 무릎 꿇고 진심 어린 사죄를 전했어야 하며 용서라는 단어는 절대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는 피해자의 가족이 겪는 혼란과 절망에 더욱더 혼란해진 대위가 관성적으로 다음 피해자 가족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동시에 계속되는 교차편집으로 대위를 뒤쫓는 골로브냐 소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골로브냐 소령은 대위의 친구를 고문한 직접 당사자이자 대위를 잡지 못하면 그 또한 처형될 수 있는 위태로움을 품고 있으며 동시에 심각한 폐 질환을 앓고 있어 설혹 대위를 붙잡더라도 그 이후의 시간이 밝지만은 않은 점을 시사하는 인물이다. 골로브냐 소령은 마침내 볼코노코프 대위를 처형하게 되지만 총살 직전의 대화를 통해 볼코노코프 대위는 용서를 통한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되었고 그것은 소령의 "빌어먹을"이라는 대사와 표정을 통해 방점을 찍게 된다.
끝까지 볼코노코프 대위를 뒤쫓아 총살하지만 볼코노코프 대위의 '용서'를 막지 못한 골로브냐 소령, 동시에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 볼코노코프 대위의 최후, 골로브냐 소령의 명령으로 붙잡혀 있던, 볼코노코프 대위가 찾아야 했던 나머지 피해자 가족이 전부 풀려나는 마지막 장면, 그럼에도 굳건히 자물쇠가 걸리는 높디높은 철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이 모든 장면이 암시하는 것 또한 당시 구소련의 독재와 이것을 청산하지 않는 현 러시아 독재 정부를 비판하는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4.무명의 여인
영화 초반, 같은 건물의 어떤 남성에게 성추행 당했음을 호소하며 볼코노포트 대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볼코노코프 대위는 식당에서 그 남성을 찾아 응징한다. 볼코노코프 대위를 포함해 이 건물에 모여사는 듯한 모든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당시 이 여인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내 남편은 참전용사이며, 나는 당에 몸담은 지 30년이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낡은 방에서 폐렴(폐병인지 정확하지 않다)에 시달리고 있죠."
볼코노코프 대위의 탈영 이후 골로브냐 소령이 대위의 방을 수색하러 왔을 때 이 여성은 똑같은 대사를 반복하며 자신을 도와줬던 볼코노코프 대위의 방을 자신이 가져도 되는지를 묻는다. 골로브냐 소령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답을 주지 않고 이후 이 여성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볼코노코프 대위의 방을 쓰게 되는지 건강은 회복하게 되는지 국가에 충성한 만큼의 혜택을 받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여성을 통해 반복된 똑같은 대사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감독은 이를 통해 국가의 역할과 그에 따른 국민과의 관계를 은유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개인의 정치 성향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면 국가는 마땅히 대우해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 정당과 정치 목표가 비집고 들어와서는 안될 것이다. 이 여인이 상기시키는 것은 러시아의 누군가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끝까지 품어야 할 의무를 다 해야 하는 자는 외면하고 위로 받아야 할 이들은 여전히 지옥불 그득한 고통의 구덩이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한국의 일면에 질문을 던진다.
5.탈출하다
볼코노코프 대위의 직업은 비밀경찰이므로 대위의 행동은 탈영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영제는 "escaped"라고 번역된다. 마침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은 볼코노코프 대위는 죽음을 통해 왜곡된 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탈출(escape)이 맞겠다. 제목이 '구원'이나 '용서' 가 아닌 이유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억울하게 처형된 피해자의 서류를 가지고 탈영한 대위이지만 실제로 다 찾아가지는 못한다. 남은 수많은 피해자의 가족은 골로브냐 소령에 의해 억류되나 결국 풀려나게 되고 그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용서를 구하는 이는 한 명에 불과하고 그 행위는 주변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끼치며, 사과를 받아야 하는 수많은 피해자의 가족은 여전히 저 밖에 외면받고 있다. 사후세계의 유무를 논하기에 앞서 어찌 됐든 이 참혹한 현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볼코노코프 대위에게 탈출이겠으나 남은 이들의 현실은 사실상 바뀐 것 없이 영화는 끝나게 되므로 이것은 도망간 자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자조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