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사이에 피어난 시
나는 수납장
서랍인 주제에 혼자 방인척 침대인척
주인을 표현해보려고
애쓰는 세입자
바깥에서 변함없이
오늘을 채우는 일기장
나로 범벅된 이곳에 모으고 있지
손에 잡히지 않는
지금 가장 필요 없는 것들
이를테면
공간, 순간, 시간들
샅샅이 뒤졌더니 나오는
행복 위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위로만 득실거린다
빈티지 수납장인가봐
빈티지 행복인가봐
의미가 똑같은 우리를 봐
빈티지해지는 일상을
간신히 문장으로 옮겨볼 뿐
항상 내 공간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방이라면 방이고, 책상이라면 책상이며, 침대라면 침대다. 10대에는 집이 망해서, 20대에는 아픈 엄마와 침대를 함께 쓰느라 나는 늘 남동생과 애매하게 방 하나를 공유했다.
모든 공간을 가족과 공유하는 통에 나는 생각에 빠져야 할 때나 나만의 일을 해야 할 때 바깥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가끔 집에 있을 땐 조금씩 묻혀 놓은 나를 샅샅이 뒤져 찾아야 안심이 됐다. 이를테면 일기장 같은 곳에 적어둔 우울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만이 나를 위로했다. 정리라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내 공간이 없는데 무엇을 정리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했던 건 정리라기 보다는 관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정리는 버리거나 채우는 일이다. 필요 없는 것을 선별해서 잘 버리고, 차곡차곡 쌓는 일이다. 나는 일기장에 내 생각을 버렸고, 집 바깥에서 생각을 채웠다.
2년 전 안산에서의 삶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시로 이사했다. 원래 살던 곳에 가려면 대중교통으로 2시간이 넘게 가야 한다. 그저 기쁘기만 했다. 드디어 혼자 사는구나, 온전한 내 공간을 갖게 됐다!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벅차올랐다. 이사를 와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자면 아침에 눈 떴을 때 변함없는 내 공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가 흘린 머리카락 위치가 다음 날에도 변함없이 똑같고, 내가 직접 치울 수 있는 것. 내 손으로 내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 행복했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내 집에서 매일 정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내가 버리고 내가 채우는 집, 온통 나로 범벅 된 이곳을 오늘은 직접 따온 상추를 씻는 소리로 채웠다. 그리고 이렇게 문장으로 남긴다. 이곳은 나의 정리가 가능한 수납장이다.
문장 사이에 피어난 시; 에세이 속 단어 조각을 모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