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돌아가야 한다 뭍으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
처음부터 이 순간이 반드시 올 거란걸 예상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첫 발을 디뎠던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벌써 돌아갈 날이라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어.'라는 말을 하는 여행의 가장 마지막 날을 상상했다. 가장 처음에 가장 마지막을 생각하다니. 나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는 왜 꼭 그 행복이 끝날 날을 상상하는 걸까.
35살이라는 나이가 적지 않지만, 사람의 생애를 놓고 보면 또 어린나이다. 하지만 정말 어린 나이부터 '죽음'은 나와 굉장히 가까이 있었다. 엄마, 아빠보다 더 부모님 같았던 외할아버지의 죽음. 바로 어제까지도 학교에서 만났던 친구의 죽음(일본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소년의 모습을 한 친구였다). 실제 죽음은 아니지만 도둑맞아 내 곁에서 존재적 죽음을 맞이한 내 강아지 동생 초롱이(스스로를 고아처럼 느끼던 시절엔 초롱이가 내 유일한 가족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생명들과 순간들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그라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어린 날의 나.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때에 가장 강하게 각인된 것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것은 끝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각했고, 그 모두가 천사 같은 존재들이었기에 천국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상실감이 커서 외롭고 또 외로웠을 뿐.
행복한 순간이면 습관처럼 행복이 끝나는 순간을 생각하는 나는, 늘 조심했다. 그 행복이 자칫 찰랑거리다 넘쳐 행복의 종말을 떠올리지 않도록 행복한 순간에 오히려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러니 이번 여행이 내게 얼마나 위태로웠겠는가.
누군가 그랬다. 나는 되게 바다 같다고. 물이기에 어디에 담기든 빈틈없이 잘 채우며 적응하지만 스스로 특유의 형태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그래서 본인이 개성이 없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세상에 바다만큼 큰 존재는 없다고. 모든 만물이 그 물에서 탄생하고, 때로는 모든 걸 집어삼킬 만큼 힘 있는 존재면서, 평소에는 그 아래 다양한 것들을 품고 있어 적재적소에 옮겨다 놓기도 하는 성실한 존재이기도 하다고. 개울물이나 호숫물과는 다른 그 어떤 물보다 특별한 물이 바다라고. 그런데 그런 바다 같다고 말했다. 나를 너무 대단하게 봐주는 것 같아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겸연쩍게 허허 웃는 내게 그 누군가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늘 크고 작은 파도가 쳐. 큰 파도가 치는 날은 많은 게 부서져 잔해가 남고, 그렇지 않더라도 잔잔한 파도가 늘 치고 있으니 잠잠할 날이 없지. 남들이 보기엔 잠잠해도 바다는 그런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을 거야. 모든 것을 품는 커다란 존재지만 늘 잠잠하지는 못하겠지. 그 모든 풍랑을 다 잠재울 순 없어도 큰 파도가 일어서 많은 게 바뀌고, 부서지지 않도록 어디서 따뜻한 게 불어오는지 어디서 찬 게 불어오는지 잘 느끼고 노련하게 대처하기를 바란다.
사실 저 말 하나도 이해 못 했다. 지금도 한 반 정도 이해하려나. 근데 저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정말 대단한 존재로 느껴져서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끈질기게 적어두었다. 지금 저기서 내가 이해하는 것은 '내 안에 뭐(주로 생각)가 너무 많아서 잔잔할 날이 없다' 정도이다. 그게 바로 이번 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순간마다 그 행복이 사라질까 무섭고 마치 이미 사라진 듯 외로운 마음이 드는 이유일까, 그게 내가 가진 특성이라서?
무튼 이번 여행일기로 돌아오자면, 며칠 전 오빠는 번지점프를 하고 나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리라 예약을 했다. 오빠는 성공적으로 번지점프를 마쳤고 이제 내 차례. 그런데 전날 저녁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흐렸다. 아침에 일어나 메일을 확인하며 예약 취소 연락이 왔나 보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래서 집결지로 떠났는데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이미 포기 상태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호텔 로비로 가서 직원분께 대신 전화를 부탁했다. 알고 보니 내 번호가 전화는 안 되는 번호라 연락을 못했는데,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원한다면 다음 세션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으나 우리는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를 이미 예약한 터라 불가했다.
조식에서 챙겨 온 사과 하나를 감사의 표시로 직원분께 드리고 짐을 맡겨둔 후, 우리는 동네 탐방에 나섰다. 비 온 뒤, 축축하게 젖은 도시는 진정 내가 그려운 유럽의 모습이었다. 무게감 있으면서도 디테일이 아름다운 그런 거. 이마저도 좋았다. 정신없이 보내는 오전이 아니라 차분하게 산책하는 오전도 행복했다.
저녁에는 스위스에서 유명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메뉴를 '퐁듀'로 정했다. 원래도 치즈를 좋아하니 우리에게 딱 맞는 메뉴겠다 싶었다. 게다가 거기서 제일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예약을 일주일 전쯤 하지 않으면 절대 먹을 수 없는 곳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가보자고 맘먹고 가봤는데, 정말 운 좋게 우리는 예약과 예약 사이의 1시간 30분을 얻어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테이블을 잡을 수 있었다.
거 봐, 오빠 나 진짜 복덩이 맞지?
왜..?
아니, 나랑 있으면 어디든 안 기다리고 바로 들어가잖아.
그랬나?
어! 오빠 홀덤할때도 내가 행운 빌어주니까, 불리한 상황에서도 딱 원한 카드 나오고 그런 거 기억하지?
그거 말고도 진짜 많잖아
아 그러네. 그땐 진짜 신기하긴 했어.
사실 처음엔 장난으로 운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복덩이라 이런 거 다 맘대로 된다고 했는데, 몇 번에 걸쳐 진짜로 그렇게 되자 쭉 밀고 있다. 복덩이 캐릭터로. 말하는 대로 되는 거라잖아요~
그 퐁듀 레스토랑은 분위기가 정말 멋졌다. 여기도 몇 백 년은 된 건물에 지은 레스토랑인 듯 작은 고성 같은 느낌도 들고. 퐁듀는 생각보다 '도전'해야 하는 음식이었다. 우리의 치즈는 생각보다 훨씬 짰고, 치즈에 채소튀김을 곁들인다는 게 생소했다. 그래서 채소는 시키지 않고 빵만 시켰는데 빵이 참 맛있었다. 스위스가 빵을 이리도 잘하는 나라였다니. 짠 것만 빼면 치즈의 풍미가 정말 좋아서 계속 먹고 싶었다. 점도도 딱 좋고, 온도도 워머로 계속 유지시키니 먹기 좋은 상태가 유지되었다. 무엇보다 그리 멋진 공간에서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며 오빠와 저녁을 함께하니 행복했다. 그 오래된 돌 벽에서 나는 냄새도 좋고, 웅성이지만 매너 있게 큰 소리는 조심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좋았다. 서로가 배려하며 자기의 권리는 지키는 유럽사람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정말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날이 밝고 오빠는 또 나를 위한 공간을 찾았다. 바로 정원 !
아직 날이 추워서 정원 안에 있는 온실은 개방하지 않았고, 슬쩍 들여다보아도 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위한 오빠의 마음이 좋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 지역을 지켜온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한 데다, 딱 필요한 곳에 있는 벤치들, 산책 나온 강아지 등이 역시나 나를 잘 아는 건 오빠가 맞다는 반증처럼 그곳에 있었다. 내내 팔짱을 끼고 오빠옆에 딱 붙어 아침이슬 촉촉한 산책을 마무리했다.
그러고 나서는 이제 오빠를 위한 곳! 바로 '시가(Ciggar) 카페'였다. 바버샵 느낌이 나는 멋진 카페에 들어가 메뉴부터 펼쳤다. 여기는 에스프레소 맛이 더 좋을 것 같아 기본으로 한 잔 시키고, 오렌지 향이 가미된 제조 카페도 시켰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곳에서 만든 디저트류도 하나 시키고. 그 후엔 오빠가 관심 있어 하는 시가를 구입하기 위해 직원에게 문의를 했다. 오빠의 취향과 시가 경험에 대해 물으며 적당한 시가와, 필요한 부속품 등을 추천해 주었다. 그 카페에서 비밀 계단을 하나 올라가면 오래된 와이너리 같은 분위기의 공간이 나오고 그곳에 시가가 가득했다. 그리고 한편에는 그 시가를 태우며 위스키를 한 잔 할 수 있는 살짝 어두운 분위기의 바도 있었다. 아. 여기를 하루 잡고 올걸.
가격이 좀 비싸긴 했지만, 나에게 이 소비는 '시간'을 사서 저장하는 일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언제든 이 시가를 피우면 이 카페에 대한 기억과, 이번 여행에서의 사소한 기억들, 우리가 카페 직원분과 나눴던 유쾌한 대화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렇게 포인트 하나가 있으면 기억은 훨씬 또렷하게 오래가니까. 이만큼 돈 아깝지 않은 소비가 어디 있겠는가.
그 후에 우리는 네덜란드 공항을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깊은 영감과 행복과 대화가 넘치던 바다에서 현실이라는 뭍으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우리는 둘 다 섬세하고 때로는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기에, 뭐든 작은 단위로 쪼개어 생각하고 느끼곤 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흐르지 못해 고이지 않도록, 그렇다고 넘쳐서 뭔가를 부수지 않도록 잘 바라봐주어야 한다. 혼자는 어려웠겠지만 바로 옆에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 고되기는커녕 행복한 서로가 있으니 아주 잘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더 많은 것을 품고, 더 많은 것을 탄생시키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있겠지?
우리는 바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