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아 Apr 17. 2024

06. 둘이서 같은 페이지 동시에 읽기.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냅니다, 우리가.

06


둘이서 한 책 같이 보기




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꽁냥꽁냥 분위기야 좋겠지만 일단 서로 읽는 속도가 다르니 한 사람은 다 읽고 궁금함을 참으며 기다리고, 한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을 느끼고 채 읽지도 않고 읽었다고 하거나 조바심 가득인 채로 글자만 보아 넘기게 될 것이다. 그저 '책 읽는 행위'를 하는 것이지 진짜 읽는 건 어려울걸?


해리포터 계단이 있는 서점 가는 길. 진짜루 책 읽는거 좋아하기도 하구요.



인생도 그렇다. 연인이든 부부든 두 사람은 인생의 한 챕터를 각자의 눈과 손으로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각자의 속도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근데 붙어서 같이 읽어야 한다. 거의 이건 뭐 미션이지. 게다가 미션임파서블 생각나는 느낌의 그 '미션'인 게, 성공하더라도 반드시 크고 작은 충돌을 통해 얻게 될 성공이기 때문이다.




오빠와 나는 공통점이 참 많다. 일단 식성이 많이 비슷하다. 소화력 약하고 신선식품 좋아하는 건 아예 같다.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템포도 얼추 비슷하다. 최대 관심사라던지 하는 디테일은 굉장히 상반된 것이 있지만 그건 따로 하면 되니까 괜찮다. 아, '따로 또 같이'가 된다는 것이 우리 커플의 큰 장점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지만 공통점이 많고, 차이가 적은 관계를 무턱대고 기대할 순 없다. 아마도 처음부터 그렇게 타고났다기보다는 서로 힘이 좀 빠진 상태, 즉 보다 수용적이고 포기가 빠를 수 있는 시기에 시작된 관계이기에 더 쉬웠을 것이라. 그게 중요한 것 같다. 에너지가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 세상이 온통 꽃밭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투태세도 다닌 적당히 말랑한 상태. 그 두 가지가 좋은 관계를 만드는 필승조건인 것 같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수용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 스스로 맘껏 즐길 수 있도록 보아주기를 잘한다. 그것 또한 오빠에게는 이해 안 되거나 더 나아가 그것에 쏟는 시간이 아깝다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나 혼자 하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지금처럼 함께 여행을 와 있는 상태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고. 하지만 본인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맞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 준다.




비 오는 추운 날씨에, 진짜 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단히 희귀한 꽃이 있는 것도 아닌 동네 꽃집을 기어코 가보고 싶다는 나였다. 눈치 아닌 눈치를 좀 보며 가자고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조식을 먹자마자 오빠가 먼저 제안해 왔다. 쌀쌀하니까 따뜻하게 입고 동네를 나가보자고. 그렇게 동네를 돌다 꽃집이 보이자 카메라를 켜며 내 등을 살짝 밀었다. 들어가 보라는 의미였다. 자신은 내가 좋아하는 꽃과 함께 있는 모습을 찍어주겠노라고. 평소라면 화장기도 없고, 꾀죄죄한 모습을 남겨봤자 어디에도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아 안 찍어도 된다고 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게 뭐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인정받고 안전하게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우리는 포르투갈을 떠나 그곳, 스위스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았다. 모든 상점들이 이른 저녁에 다 닫아서 좋은 시작점을 찾기 어려웠지만 운 좋게 맛도 좋고, 주인 분들이 유쾌한 곳을 찾았다. 게다가 오빠의 추천메뉴 '굴라쉬'를 주문할 수 있었다. 나는 밀가루를 뭉쳐놓은 형태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편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니 '굴라쉬'는 뭉친 밀가루를 소스에 찍어먹는 형태였다. 와, 메뉴에 있지만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메뉴다. 그런데 스위스에 다 와 갈 무렵부터 오빠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 음식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는지 내게 꼭 먹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 음식이 나오자 머리가 살짝 멈췄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이신 주인분이 아주 정성스럽게 만든 집밥 느낌의 음식이고, 아들인 직원분이 유쾌하게 가져다주신 음식. 게다가 오빠의 최고 추천메뉴! 그러나, 내게는 그저 밀가루 덩어리였다(엉엉). 그렇지만 금세 재밌게 느껴졌다. 내 입맛에 꼭 맞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자 하는 욕구보다, 자신의 추천메뉴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뿌듯해하는 오빠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한 입 먹었다.



오빠, 이게 원래 이렇게 짭짤한가?
아, 사실 내가 아는 그 '굴라쉬'랑 비주얼도 좀 다르고 맛도 다르긴 해.
오빠 입맛에 맞아? 아니면 별로야?
별로까진 아닌데, 기대한 거랑 달라서 아쉽네. 근아도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할 텐데 괜히 추천해 가지고 내가.
사실 맛있다고는 못하겠는데 재밌어. 웃긴 기억이 될 것 같아.


그래 뭐든 그쪽이면 괜찮지.
근데 먹다 보니 좀 덜 짜기만 했어도 괜찮았으려나 싶네
그러고 보니 그럴 것도 같다




오빠의 추억을 공유하는 일이었다, 내가 굴라쉬를 먹는다는 것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걸로 또 깔깔 웃으며 재밌는 모먼트가 만들어졌다. 덩달아 모자지간인 가게 분들도 즐거우셨는지 우리 테이블에 와서 한 참 수다를 늘어놓고 가시고. 내가 싫어하는 밀가루 덩어리 요리 '굴라쉬'는 오빠의 추억을 공유하는 수단이었고 하루의 저녁식사를 유쾌하게 만든 재밋거리였다. 그리 맛있지도 못했는데 끝까지 책임감 있게 먹는 오빠를 보며, 저 사람은 본인 추억에도 저렇게 열심히구나 싶었다. 참 귀여운 사람이다.


이 에피소드는 오빠만이 아니라 나 또한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오빠를 위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로 써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 사실 비율로 따지면 나는 3 정도 되려나? 오빠가 나머지 7 정도로 나를 받아들여주고 있긴 하다. 아무리 생색을 내보려 해도 3 뿐이다.


30대 중반이 되어가지고, 그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조카 선물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인형가방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난데. 고르고 고민하고를 수없이 반복하는 나를 기다려주고 사고 싶으면 사라고까지 해주는 거 쉽지 않다. 나였음 나가서 다른데 보고 있는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인형 가방이다. 너무 귀여워서 취향 상관 없이 설득력이 좀 있으려나?



그건 그렇고,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관심사 중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바로 '물놀이'이다. 스위스에 오기로 계획하고 제일 먼저 생각한 건 '호수에서 수영하기'였다. 다음 날 우리는 바로 버스를 타고 '툰 호수'를 향했다.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해서 좀 걱정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물에는 들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다행히 햇볕은 따뜻했고 근처에 서핑샵이 있어서 수영복도 살 수 있었다. 오빠는 트라우져만 입고 들어가면 되니 괜찮다고 했고. 여기서 산 수영복. 보물로 바로 등재시켰다.




이 날을 어떻게 잊을까. 만약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날이 온다면, 여기로 오면 된다. 다 기억날 거다 이 기억을 필두로. 그만큼 절대로 잊지 못할 행복한 기억이 만들어진 날. 반짝반짝한 물빛이 영롱했고 푸르다 못해 눈 시린 물 색이 경이로웠다. 저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물을 가르는 사람들.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는 조식에서 슬쩍 해온 프렛즐 2개, 바나나 2개를 풀밭에 풀어놓고 옷을 훌훌 벗었다. 오빠가 먼저 들어가려 물로 다가가는데 어떤 여자분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약간 황급히 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수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뭍으로 손을 뻗어 옷가지로 몸을 가린 채 눈 깜짝할 새 옷을 입었고 귀엽게 눈을 찡긋하며 우리의 차례를 알렸다. 보니까 스위스의 대부분 모든 호수는 쉽게 입수할 수 있는 계단이 있거나, 수영장처럼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2m 정도 더 물로 들어가면 혼자 딱 서있기 좋은 다이빙대도 있고. 그런 데서 둥둥 뜨는 자유수영을 할 줄 몰라 걱정이 좀 되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로 들어가면 바로 그곳부터 옆으로 길게 그리고 깊은 곳을 향해 약간의 높은 지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편평한 돌바닥인 것으로 보아 인공적으로 만든 얕은 영역 같았다. 화장기 없는 가벼운 얼굴과 편한 수영복 하나 가볍게 걸치고 들어간 물에서, 하늘 보고 둥둥 떠있기도 하고 잠수해서 물아래도 보고 어푸어푸 개구리 수영도 했다. 그 위 풀 밭에는 광합성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다른 사람들과 좀 신경질적인 백조들이 있었고, 푸르고 키가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했다. 행복했다. 내가 만약 죽는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런 순간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에 갔다가 배가 고파진 우리는 근처 다른 마을을 들러 저녁을 먹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딱 봐도 타샤튜더(영국, 동화작가) 할머니가 떠오르는 노 부부 한쌍이 오셨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마을이 집인 분들이었다. 오늘은 두 분이서 다른 마을로 여행을 다니는 중이시라고. 거기서 서로 못하는 영어를 동원해 가며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사실 따-악히 말 같지는 않았고 그저 내가 쓸 수 있는 손짓, 발짓, 목소리를 통해 인상이 아주 좋으시다고, 서로 잠깐의 인연이 되는 이 순간이 즐겁다고,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언젠가 또 만나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같은 버스를 탔고, 먼저 내려 버스 안의 우리에게 힘차게 안녕을 빌어주셨다. 천국에서 마실 나온 천사들 같았다.



여행할 때 가장 좋은 점은 우리 둘, 식성이 아주 비슷하다는 점이다. 메뉴 고를 때 전혀 협상이 필요 없다. 그런 우리가 간 곳은 멕시칸 요릿집. 생각보다 가격이 높지 않아 좋은 가격으로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양이 적게 나오니 원하는 만큼만 양을 조절해 주문할 수도 있었고. 적당히 고픈 배를 입에 맞는 메뉴로 알맞게 채우고 그 근처를 산책했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싶은 나날들이었다.




수용이 기반이 된 관계. 이보다 안정적일 수 없다. 서로의 템포를 인정해 때로는 좀 서두르고 때로는 속도를 낮춰가며 같은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는 일.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나보다 상대가 더 내게 와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려면 일단 내가 먼저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보이거든요. 보고 시작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순간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예요,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 내게 어떤 마음으로 오고 있는지.


이전 05화 05.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써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