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SBS스페셜에서 가회동 집사 빈센트의 '쓸모학 개론'이라는 다큐를 봤다. 남편이나 나나 둘 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는데, 20대의 나와 30대의 우리, 한국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변했나, 생각을 해보다가 글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소비에 대한 변화/
돌이켜보면 20대 한국에서의 나는 물질을 중요시했다. 그것들을 하기 위해 돈이 중요했고 열심히 벌었다. 머리를 자르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향긋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하기 위해 돈을 썼다. 여행은 연휴 껴서 가야 하니, 평상시보다 가격이 더 비싸니까 여유로운 자금은 더 중요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 안 들어가는 게 없었다. 이런 물질주의는 아부다비에서 오일머니를 맛보며 거의 정점을 찍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누릴 수 있는 것, 살 수 있는 것이 확 늘어나는 것 같았다. 똑같은 커피, 음식, 물건, 여행이어도 돈을 더 들이니 질이 달라졌다. 당시엔, 삶의 질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돈도 더 많이 벌고 싶었다. 흔히들 말하는 씨X비용 그런 것으로는 돈을 쓰지 않았다, 그냥 나를 위한 소비가 내 개인 만족감을 증대시켰다. 그렇다고 막 과소비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삶의 질을 좀 높이기 위해 돈을 쓰는게 20대 미혼 여자로서, 뭔가 그런 행동 양식이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계를 느꼈다. 내가 버는 돈의 한계, 어차피 내가 다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한계, 가져도 가져도 더 좋은 것이 보인다는 문제. 가져도 그 행복과 만족감이 생각보다 짧다는 한계. 이런 한계를 결정적으로 느낀 것이, 2016년 겨울에 설날껴서 호주를 다녀오고서다. 일상에서의 탈출이라는 미명 아래 호주로 여행을 갔는데, 여행 가서도 다시 돌아갈 걱정이 들고, 돌아와서도 뭔가 기분이 예전처럼 리프레쉬 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이 안 됐던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을 여행 다니면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한국 가서 잠깐 쉬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내 미래를 예상해보았다. 내가 나이 들어 은퇴하면 나에게 남는 것은 이미 닳고 해진 물건들과, 삶의 질을 높인다고 쓰며 즐긴 영수증과 사진들 정도 남았으려나. 차라리 나의 경험과 배움을 위에 돈을 쓰자.
결국 사람은 자기의 경험과 추억으로 사니까
물론 습관은 한 번에 버리기 어렵다. 나의 브랜드충 습성은 영국에 와서 초반까지도 남아 있었다. 영국에 왔으니, 버버리 코트는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고 멀버리도 저렴하다고 하니까 안사면 손해같은. 앗! 그런데 브랜드를 입는 사람은 주로 중국인. 중국 어린 학생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것을 보니, 정말 소유욕 구매욕이 싹 사라졌다. 200만원짜리 신발이 남대문의 그것과 무슨차이가 있나. 하나도 멋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중국인으로 오해받으면 짜증 나는데, 저렇게 하고 다니다가 100프로 중국인처럼 보일 것 같았다. 거기다 이런 중국인들은 항상 소매치기의 대상이 된다. 신발도 좋은 것을 신으면 도보가 울퉁불퉁해서 금방 닳고, 비도 자주 오니 가방도 금방 더러워진다. 그러다보니 안타깝게도(?) 내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명품들은 거의 쓸 수 없이 먼지만 쌓이고 있다. 내가 뭘 하던 뭘 입던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그래서 실용적인 것을 찾게 되었다. 어차피 이런 것들은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이니 그 기능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 신기하리만큼 커졌다. 오히려 몸이 건강해서 신체 조건이 좋으면 아무거나 입어도 훨씬 멋이 나는 것을 자주 목격하니, 더 이상 여기에 큰돈을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나의 경험에 돈을 쓰는 것. 여기 오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변한 소비패턴의 변화다.
/생활 스킬 향상/
불과 2년 전까지도,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는 동안 부모님의 보호 아래 지냈으니 내가 할 줄 아는 실생활 스킬은 운전 정도? 집에서 밥통이나 세탁기는 작동 시켜본 적도 없고, 전자레인지만 돌렸다. 집안일은 소소하게 마늘 까기나 야채 다듬기 정도 했던 것 같다. 공부한다 회사 다닌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렇게 다시 생각해보니, 엄마한테 미안하네 ㅠ
영국 와서 밥해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 외 잡다한 집안일을 하려니, 벅찼다. 생전 안 하던 것을 하려니 느리고 어설펐다. 집안일이라는게 할 일은 많은데 막상 하면 티도 안 난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너무 당연하게 받고 있었다보니 그 가치를 망각했다. 내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하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한국이라면 또 부모님의 도움, 누군가에게 의지했을 테지만, 어쨌든 이곳에 우리 둘만 혈혈 단신으로 나와있으니, ‘생존’을 위해서 스킬을 늘려야 했다. 생각해보니 1년 반 동안 꽤 많이 쌓였다!
·요리 스킬: 어차피 외식해도 맛이 기대 이하니, 웬만한 것은 우리가 다 해 먹는다. 재료비도 싸니까 실패해서 버려도 사실 부담이 없다. 하나하나 시도하는 것이 늘다 보니, 할 줄 아는 것도 많아졌다. 햄버거, 피자, 짬뽕, 탕수육부터 베이킹까지 한다. 최근에는 둘이 각종 디저트 연마 중이다. 한국에서 둘이 커피랑 디저트 배운다고 비싼 돈 주고 배웠는데, 다 까먹었지만 그땐 왜 그랬지? 우리 입에 맞게 최대한 건강하게 유기농 재료로 만든다. 누굴 초대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멋들어지게 스타터부터 디저트까지 구색 갖추어 나름 파인 다이닝처럼 내줄 수 있는 요리 능력치를 습득했다 (John 할아버지에게 배운 hospitality 스킬 추가). 여느 레스토랑 까페 안부럽다. 어디 가도 굶어 죽진 않겠다.
·운동 스킬: 타지나 와서 아프면 안 된다. 의료보험비 다 냈지만, 안 아픈 게 돈 버는 것이니 건강 챙겨야 한다. 이렇게 예민 하게 생각해서인지 다행히 둘 다 아직까지 병원 한번 안 가고 무사히 살고 있다. 다행히도, 이곳에 스포츠 센터 이용권이 한국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한 달 5만 원 안쪽이면 수영장부터 GYM, Fitness 수업까지 커버가 되는데, 여름에는 수영, 보통 땐 요가나 필라테스 스피닝을 한다. 주말에는 트레킹까지 다니니 몸이 좋아졌다. 특히 최근에 남편이나 나나 신체 변화를 급격히 느끼고 있다. 남편은 배도 들어가고 어깨도 단단해지고, 나도 힘없이 마른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일단 미중년을 목표로 한다. 역시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것인가? 한국에서 비싼 돈 주고 운동해도 근육이 안 붙어서, 내 체질이 그런 줄 알았다. 내 몸에 이렇게 근육이 잘 붙는지 이제껏 몰랐다. 나이는 들었지만 오히려 전보다 탄탄한 쓸모 있는 몸이 돼가고 있다.
·DIY: 이케아 조립을 마스터했다. 침대 소파 식탁 테이블 수납장 의자 다 조립했으니 자신감 폭발이다. 문 가구 벽 페인트칠까지 하니, 집안 곳곳 우리의 손길이 안 들어간 곳이 없다. 언젠가 우리 집만 만들면 끝판왕이 될 것 같다. 의식주에서 ‘주’까지 해결하는 능력치를 쌓는 중이다.
·기타 스킬: 머리 자르기. 이곳 애들 기술을 못 믿는 것이 이유다. 한국 미용실만큼 섬세하지 않다. 내가 자르는 게 맡기는 것보다 낫겠다!라는 생각으로 시도했고 아직까진 기장만 잘라서 성공적이다. 그 이상의 기술은 못하겠지만, 머리 자르기 내공 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하나하나 습득한 것이지만 생각해보니 꽤 많은 필요한 스킬을 익힌 것 같아 내심 뿌듯하다. 물론 돈 주고 하면, 혹은 타인에게 의지하면 더 편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살기도 했고... 더구나 요즘 시대에 하나부터 열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태반이니 이런 라이프 스타일은 고생을 사서 하는 피곤한 행위일 수도. 분업과 전문화는 자본주의 효율성을 위한 미덕이니까. 이 세상 모든 것에 돈을 쓰라 손짓한다. 그렇지만 의식주, 내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내 환경이다. 결국 내가 하는 것이 가장 나한테 최적화 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가끔 귀찮기도 하다. 근데 습관 돼서 그냥 하게 된다. 시간도 이제는 덜 걸린다. 아직 방송에 나온 빈센트 할아버지만큼의 능력치에는 1/100도 안된다. 아마 그 정도는 못 따라갈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존 스킬을 연마해 가는 것이니 ‘평생’ 쓸모는 있겠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