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 (Islay) 위스키 증류소 투어기
[덕질의 끝판은 직접 성지에 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라 하였는가]
가게에서 병 라벨을 꼼꼼히 읽어보며 한 병을 신중히 고르고, 음악과 함께 방구석에서 음미하고, 휴대폰 앱을 이용해 시세를 확인하고, 유튜브로 정보를 얻고, 단골바에서 바텐더의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즐기는 것. 이 정도의 행위로도 일상에서 위스키는 충분히 즐거운 형태를 유지하며 좋은 밸런스로 동행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관심사가 하나는 아니다. 위스키 이외에 스포츠, 음악 등 다른 분야도 취미로 즐기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소위, 성지까지 찾아가서 관심 있는 분야를 온몸으로 느끼고 온 일은 지금껏 없었다. 예를 들어, NBA를 너무 좋아해서 LA레이커스의 홈경기를 직관하고, 신앙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성지순례길에 오르거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일처럼. 그 정도의 열정을 관심사에 쏟아부은 일이 나에겐 아직 없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떠날 결심을 하다]
3~4월 무렵, 아내와 올 휴가를 어디로 가야 할지 의논했다. 뉴욕, 스페인, 포르투갈, 멕시코 등 여러 국가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그래 이번엔 여기닷!' 할 정도의 임팩트는 왠지 없었다. 후보지 중 스페인, 포르투갈 쪽으로 많이 기울어 관련 서적까지 구매하며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즈음에 갑자기 여러 여행 예능에서 이 두 국가가 자주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가 휴가를 갈 때엔 오버투어리즘이 예상되었고, 문득 작년에 겪은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던) 이탈리아 여행이 떠올라서 마음을 접게 되었다. 그렇게 휴가지 선정 문제는 잠시 유예했고, 훗날 다시 토의해 보기로 하였다.
보통 나의 오전 루틴은 이러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노트북으로 메일함을 열어 체크하고, 집안일을 해치운 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 출근 전까지 커피 한 잔과 함께 독서를 하곤 한다. 올 초엔 위스키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다. 위스키의 기본적인 지식과 상식을 나열한 책, 위스키 칵테일에 대한 책, 전 세계 유명 위스키바를 소개하고 그곳의 종사자들과의 인터뷰를 실은 잡지 등. 좋아하는 주종 중 단순히 위스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시작한 관련 서적 독파였지만, 언젠가부터 너무 이론적인 내용만을 다룬 서적만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스키 상식을 일방적으로 설명하거나 찬사만 늘어놓은 책이 아닌, 다른 장르의 위스키 관련 도서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평소 와인과 위스키 애호가로 알려진 일본 작가 후라카미 하루키가 위스키와 관련한 서적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홀린 듯 구매하였다. 책의 제목은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하여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 적어도 나는 -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中-
책은 하루키가 40대 시절, 위스키의 성지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여행하며 쓴 여행 에세이다.
햇볕 드는 거실에서 커피 한잔 하며 심각한 생각 없이 읽기 딱 좋은 책이었다. 특히 나의 마음에 쏙 들어온 파트는 스코틀랜드의 스카이섬 방문기이다. 스카이섬의 드넓은 평야와 매서운 바람, 위스키 증류소 직원과의 대화, 굴 위에 위스키를 부은 뒤 음미하는 것. 그 모든 장면이 내가 하루키와 동행하며 여행을 하고 있다 착각할 만큼 생생히 묘사되었다. 스카이섬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글을 읽고 있자니, 문득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그래, 이번 여행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증류소를 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며칠 동안 머리에 맴돌았다. 그곳에 가서 스코틀랜드의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차가워진 몸을 위스키로 덮이고, 황량한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본래 여행 스타일은, 자연보다는 도심을 탐방하고 싶어 하는 타입이지만, 위스키가 가미된 여행이라면 드넓은 초원과 바다가 있는 곳에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에 아내와 휴가지에 대해 다시 상의했고, 내가 읽은 책과 위스키에 대한 열정을 열심히 설명하니 고맙게도 이기적인 나의 여행지 선택에 동의해 주었다. 다시 한번 고맙다.
[난생처음 경험한 프로펠러 비행기]
아일라섬으로 향하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공항으로 가야 했다. 인천 공항에서 네덜란드를 경유하여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에든버러에 도착하여 2박 정도 머물며 조금 쉬었다가, 글래스고로 이동하였다. 글래스고 공항에서는 로건에어(Logan Air)라는 프로펠러 달린 작고 스타일리시(?)한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이 비행기는 하루에 2번만 운행한다. 그마저도 기상악화로 뜨지 않거나 딜레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한다.) '경비행기를 타는 행위'에 별생각 없던 나와 달리, 아내는 심히 불안해했다. 원체 큰 비행기도 이륙과 착륙을 할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긴장을 하는지라, 저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면 행여나 기절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감... 뭐, 결론적으론 별 일 없이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아일라섬에 도착하였다.
아일라 공항은 매우 아담했다. 마치 시골 간이역 같이. '이곳 직원들은 아마 비행기가 착륙하고 이륙할 때만 잠깐씩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사무실에 깔려 있는 침대에 누워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무례한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니, 직원들에게 죄송하다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일라 사람들의 따뜻함]
간이역 같은 공항을 나오니 이번엔 미사일 파편을 맞은듯한 모습의 황량한 버스 정류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사진도 찍고, 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아일라섬의 버스 배차 간격은 50분 정도 된다.) 뿔테 안경에 헤링본 재킷을 입은(그 모습을 본 순간 킹스맨의 콜린퍼스가 떠올랐다.) 신사분이 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보모어(Bowmore)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도 마침 그쪽으로 간다고 태워주겠다고 하셨다. 큰 캐리어가방 두 개에 바람을 맞고 있던 모습이 불쌍한 생쥐처럼 보이셨나... 피곤한 몸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어? 사양하지 말고 어서 올라타라고!!" 하며 소리쳤으나 마음은 한 번쯤 의심을 해보라고 만류했다.
'진짜 타도 되나? 돈을 내야 하는 건가? 정말 정말 타고 싶다... 택시는 아니겠지? 내릴 때 감사의 표현으로 지폐 몇 장 드리면 되려나? 정말 방향이 같아서 좋은 의도로 태워주신다고 한 건가?'
온갖 의문이 솟았지만 어느새 몸은 시트에 기대고 있었고, 차는 평화롭게 달리고 있었다. 신사분은 운전을 하며 창 밖 풍경을 설명해 주셨다. 오른편에 까만 숯처럼 보이는 게 이탄(영어로 피트라고 하며, 이 지역의 위스키의 독특한 풍미를 내게 하는 주 재료)이다, 저 쪽엔 양이 보이고 이 쪽엔 소가 보인다, 아일라의 전통적인 가옥의 모습이다 등등... 설명을 들으며 20분쯤 달리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손수 짐까지 내려주시고, 점심 식사할 적당한 레스토랑까지 알려주신 신사분은 좋은 여행 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쿨하게 퇴장하셨다. 그 신사분 덕분에 아일라섬은 나에게 너무나 좋은 첫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이 첫날의 친절한 기사님 외에도, 아일라의 현지인들은 모두가 따뜻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상인과 경찰분, 모두 눈만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주셨다. 숙소 근처의 작은 Bar에서 무엇을 마실지 못 정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시음을 해보라며 작은 잔에 맥주를 조금씩 따라주셨던 바텐더 할머니. 떠나던 날 공항까지 태워준 택시기사 Cathy까지, 모두 따뜻하고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날씨 하나는 정말 요란하고 변덕스러운 섬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해가 떠있는 듯하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나]
여행의 모든 시간이 행복하거나 즐겁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몸은 지치게 마련이고, 계획과 어긋나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이슈가 발생하거나 불친절한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다.
아일라에서는 이러한 모든 불행은 잠시 보관함에 두고 온 듯,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피트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본 순간.(태우지 않은 피트는 별 향이 나지 않는다.)
아드벡(Ardbeg) 증류소에서 라프로익(Laphroaig) 증류소까지 집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으며 걸은 순간. (비가 오든 말든 평화로이 풀을 뜯던 셀 수 없이 많은 양들도 떠오른다)
숙소에서 치킨수프를 먹으며 바라본 창밖의 항구.
그 모든 순간들은 당시의 나, 지금 후기를 쓰고 있는 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다른 국가가 아니라 마치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체험을 하고 온 것도 같다.
비록 하루키가 그랬던 것처럼, 신선한 굴 위에 위스키를 부어 먹는 행복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하루에 20번 정도 그쳤다 내렸다 반복하는 비와 그 요란함을 용서해 달라는 듯 잠시 후 방긋 웃는 모습으로 나타난 무지개의 풍경, 숙소에서 샤워 후에 포트앨런(Port Ellen)의 석양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위스키가 주는 행복까지. 너무나 많은 행복을 이미 선물 받았다.
왜 하루키는 위스키가 우리의 언어가 되었으면, 이라고 생각했을까.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된다. 사실 굳이 나의 미숙한 언어와 문장으로 위스키의 맛과 아일라의 땅과 바람 냄새를 일일이 표현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위스키 한 모금 후에, 여행 메이트의 눈을 바라만 봐도 언어는 충분히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