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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Mar 31. 2017

싱가포르에서의 세렌디피티

새로운 발견이 뜻밖의 발견으로 이어지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오래전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제목. 뜻은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왠지 익숙한 단어. 세렌디피티는 '뜻밖의 발견, 의도하지 않은 발견, 운 좋게 발견한 것'을 뜻한다. 싱가포르의 티옹 바루(Tiong Bahru)는 내게 있어 타이밍이 어우러진 뜻밖의 발견이었다.


4일간의 싱가포르 여행을 계획하며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이번에 꼭 가볼 장소와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룰 장소를 결정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는 내게 즐거운 비명 그만 지르라며 핀잔을 주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고민이 친구에게 소심한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나 보다.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여도 볼거리가 많으므로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욕심을 부리며 유명 관광지에 점만 찍는 여행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나는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깊게 보고 싶다. 내게 여행은 사람을 사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티옹 바루는 내가 정한 머스트 비지트(must-visit) 장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평범한 주택가에서 요즘 가장 핫한 장소로 떠올랐다는 티옹 바루. 작은 골목 곳곳에 카페, 레스토랑, 디자인숍 등이 아기자기 들어있는 곳이라는 여행정보는 내게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볼 수 있는 트렌드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좀 더 싱가포르다운 장소를 찾아가고 싶었던 나는 티옹 바루의 순위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내렸다.



티옹 바루 재래시장 건물. 5월까지 보수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 생각은 틀렸다. 티옹 바루는 내 싱가포르 여행에서 세렌디피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재래시장 방문 계획을 세웠었다. 티옹 바루의 재래시장이 볼만하다고 해서 티옹바루 지역은 마켓만 둘러보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리라 맘먹었었다. 티옹 바루 재래시장에 도착했던 날 아침, 건물 자체가 보수공사 중이라 5월까지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아침부터 맥이 빠졌지만 실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헝클어진 오전 일정을 대체할 플랜 B가 필요했다. 일단 앉아서 차를 한잔 마시며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티옹 바루 베이커리(Tiong Bahru Bakery)

예쁜 싸인이 맘에 들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브런치를 먹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로스팅 잘 된 원두에서 갓 추출한 커피 향이 내 후각을 사로잡았다. 다양한 페이스트리가 진열된 윈도우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내 손가락은 어느새 케이크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그니처 페이스트리 대신 나는 판단 케이크를 먹어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인 판단(pandan) 잎으로 만든 케이크 맛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롱 블랙커피와 잘 어울렸다. 계란을 팔던 가게를 개조했다는 이 곳은 알고 보니 아주 유명한 베이커리였다. 의도하지 않은 발견이었다.






루 아저씨네 하이난 커리라이스 (Loo's Hainanese Curry Rice)

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티옹 바루 베이커리가 맘에 들자 이 지역에 호기심이 일었다. 조금 더 둘러보려고 시작한 발걸음이었는데 가이드북을 쓸 기세로 온 골목을 걷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인데 사람들이 긴 줄을 선 식당이 보였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관광객은 전혀 없고 전부 현지인으로 보였다.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다가 몇 시간에 걸쳐 티옹바루 지역 탐험을 마친 나는 결국 이 곳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뭘 주문해야 할 지 우물쭈물 서있으니 인상 좋은 아저씨가 물었다. "Do you like pork chop?" 고개를 끄덕이니 돼지고기를 돈가스처럼 튀겨서 익힌 양배추와 함께 밥 위에 얹고, 커리를 부어주셨다. 중국과 말레이 음식문화가 결합된 페라나칸 가정식의 하나라고 한다. 한국돈으로 2천원이 조금 넘는 저렴한 가격이라 내 눈을 의심했다. 매콤한 커리가 맛나서 나는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뜻밖에 발견한 맛집이었다.


북스액추얼리(BooksActually)

네이밍이 기발하다. 독립서점인 북스 액추얼리는 원래 다른 지역에 있다가 티옹 바루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 서점의 단골인 예술가들이 여기로 드나들면서 입소문을 탔고 티옹 바루 지역이 핫 플레이스로 뜨게 된 주역 중 하나라고 한다. 서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이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영어로 된 책 사이에 한국 소설집도 몇 권 있었다. 서점 안을 돌아다니는 예쁜 고양이가 있다. 책에만 관심이 있는 지 손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않고 도도하다. 나는 독특한 요리책 하나와 여행 에세이 두 권을 샀다. 갖고 싶었던 종류의 책이었고 운 좋은 발견이었다.








우리는 가이드북과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뒤지며 여행을 계획한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찾은 장소는 종종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한편, 우연히 발견한 장소나 사물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러한 뜻밖의 발견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티옹 바루는 그런 곳이다.








지난달 나는 부탄 여행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발견’에 관한 글을 썼고, 그 글은 ‘뜻밖의 발견’이라는 싱가포르 여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티옹 바루는 내게 있어 싱가포르 여행의 세렌디피티였다. 따라서 나는 티옹 바루에 대한 정보는 너무 많이 쓰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어느 날 싱가포르를 여행할 때 발견할 뜻밖의 재미를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 본 포스트는 싱가포르 관광청으로부터 일부 경비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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