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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Apr 28. 2017

생각을 다듬고 솎아내며 담근 열무 얼갈이 물김치

음식을 만들며 답을 찾다


어쩌자고 덜컥 사 왔을까.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보고 있으니 후회가 밀려왔다. 글을 재촉하듯 컴퓨터 화면에서 번쩍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다 벌떡 일어섰다. 글의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고 인내심은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바람을 쐬는 것이 상책이다.


평소에 산책하는 코스와 다른 방향으로 갔다. 글의 실마리를 찾아야만 했다. 습관처럼 굳어진 움직임 속에서는 변화를 이뤄내기 어렵다. 새로운 사물과 풍경이 눈에 들어오니 한 곳으로 치밀어 오르던 감정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봄바람에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과일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봄나물 코너 옆에 뜬금없이 쌓여있는 열무와 얼갈이배추에 눈이 갔다. 요즘에야 사시사철 채소를 살 수 있다지만 그래도 마치 제철인양 그들은 무척 싱싱해 보였다. 맵싸한 열무와 달큰한 얼갈이배추의 맛이 어우러진 시원한 물김치가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한 단씩 집어 들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후회했다. ‘양도 많은데 언제 다듬고 씻어서 김치를 담근담. 원고는 제자리인 채 오늘 하루 또 그냥 보내게 생겼네. 맘은 급하고 시간은 없는데 힘들게 사서 고생을 하다니.’

내 맘을 알아차렸는지 싱싱하던 채소들이 금세 시무룩해진 듯 보였다. 저질렀으니 책임을 져야 했다. 끈으로 묶여있는 단을 천천히 풀었다. 열무의 잔뿌리 사이로 흙이 묻어있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물고 뻗어나가면 수없는 잡념의 뿌리가 달리듯이 잔뿌리가 많을수록 흙이 많이 달라붙어 있다. 뿌리를 아예 잘라버릴까 하다가 칼끝으로 살살 긁어내듯 다듬었다. 열무의 맵싸한 맛은 뿌리에서 나오므로 살려내야지. 누렇게 떠서 마른 잎은 솎아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푸르고 싱싱해도 속을 끓이다 보면 말라버리기 십상이다. 다듬고 솎아내니 필요한 부분만 남았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채소에 간이 잘 배게 하려면 소금물에 먼저 절여야 한다. 열무는 ‘여린 무’라 자꾸 들쑤시면 풋내가 나기 쉬워 아이 다루듯 살살 뒤집어 주는 게 좋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숨이 조금 죽었을 때 깨끗한 물에 씻어 건져 물기를 뺀다.


양념은 어떻게 할까. 인터넷 레시피도 뒤져보고 쿠킹클라스에서 배웠던 요리샘의 레시피도 찾아보았다. 팁은 조금씩 참고하되 오늘은 나만의 레시피로 만들어 봐야겠다. 냉장고 한 켠에서 사둔 지 오래된 배 하나와 무 반쪽을 찾아냈다. 강판에 갈아 즙만 짜내고 찌꺼기는 버렸다. 양파도 같이 갈아 즙만 짜낸다. 요즘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예민해지는 터라 고춧가루는 과감히 뺐다. 대신 색을 내주기 위해 붉은색 파프리카를 믹서에 갈았고 마늘과 생강은 따로 곱게 다져놓았다. 대저토마토는 웨지형으로 썰었다. 풋내가 나지 않게 잘 익히려면 찹쌀풀을 쑤어 넣으면 좋다. 찹쌀풀이 식으면 짜 놓은 즙과 물을 붓고 소금과 멸치액젓을 풀어 간을 맞춘다.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켜켜이 놓으며 국물을 부어준다.




입맛이 없고 속이 답답할 때 국수라도 훌훌 말아서 먹으려면 국물을 넉넉하게 잡는 게 좋을 것 같다. 채소에 간이 배어들려면 국물은 간간해야 나중에 전체적으로 간이 맞는다. 들뜨지 않도록 돌이나 무거운 그릇으로 김치를 눌러준다. 하루 정도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으면 시원하게 맛이 들어갈 물김치 완성이다.



반나절 이상 시간이 들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 채소를 다듬고 양념을 준비하며 그동안 내 속을 끓이던 실체가 무엇인지 보았다. 불필요한 것들을 솎아내고 다듬으니 생각도 정리가 되었다. 큰 김치통 하나가 가득 채워지니 그동안 바닥났던 인내심도 다시 메워졌다. 이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알맞게 익을 것이다. 김치도 내 생각도.  




재료 : 열무 1단, 얼갈이배추 1단, 배 1개, 무 반개, 중간 크기 양파 2개, 파프리카 1개, 대저토마토 5개, 마늘 10쪽, 생강 1톨, 찹쌀풀 (물 2컵 + 찹쌀가루 2큰술), 물 6컵, 소금 4큰술, 멸치액젓 2큰술, 절임 소금물 (물 2리터 + 소금 1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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