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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Aug 28. 2018

평화 없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며

중동 3개국 여행을 마치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한자성어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 네 가족이 산다면 어떨까. 민족과 종교마저 다르다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4개의 구역(무슬림 지구, 크리스천 지구, 아르메니아인 지구, 유대인 지구)으로 나뉘어 있다. 1 제곱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도시에 하늘을 지붕 삼아 네 가족이 모여 살고 있는 셈이다. 기나긴 역사를 가진 예루살렘에서 이들은 과연 평화롭게 잘 살아왔을까.


유대인은 예루살렘의 역사를 대략 3천 년 정도로 이야기 하지만 도시의 기원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천 년경 가나안(Canaan) 땅에는 여부스족(Jebusites)이 도시를 이루어 거주하였다고 한다. 도시의 이름은 ‘우루살림(Urusalim)이라 불렸는데 ‘평화의 터전 또는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다. 우루살림이 변형되어 지금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쓰이게 된 듯하다. 기원전 천 년 경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다윗왕이 여부스족을 몰아내고 이 곳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오늘날까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이 평화로웠던 기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수많은 전쟁을 통해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온 예루살렘은 현재도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는 도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루살렘은 구시가지(Old City)를 일컫는다. 1860년대 유대인이 구시가지 주변에 정착촌을 건설하기 전까지는 현재의 구시가지가 예루살렘의 전부였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으로 분리되었고 구시가지는 동예루살렘에 위치해 있다.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까지 점령하고 있지만 국제법상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니다.


구시가지 지도 (구글 이미지 참고)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오래전부터 대략 4구역으로 나누어지긴 했으나 지금과 같은 명칭으로 불리게 된 건 19세기부터라고 한다. 성의 북동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무슬림 지구, 크리스천 지구, 아르메니아인 지구 그리고 유대인 지구로 나뉜다. 구역별로 특징이 뚜렷하지만 따로 장벽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미로같이 이어지는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구역이 바뀐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네 개의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듯 하다. 예루살렘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무슬림 지구(Muslim Quarter)

예루살렘 성벽에 나 있는 8개의 문 중에 가장 통행량이 많다는 다마스쿠스 게이트 성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무슬림 지구다. 여러 가지 상품을 파느라 떠들썩한 재래시장은 활기에 차 있으며 이국적인 분위기는 단숨에 여행자를 매혹한다.



‘수크’라 불리는 재래시장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싱싱함이 넘치는 채소와 과일, 금방 잡아 올린 듯한 생선과 선도 좋은 정육, 갓 구워낸 빵들은 장을 봐서 음식을 만들고 싶도록 요리하고 싶은 욕구를 부추긴다. 온갖 이국적인 향신료와 구수한 커피 향은 발걸음을 자꾸 멈추게 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숯불구이 케밥 냄새에 우리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양고기 케밥을 먹고 나면 달콤한 디저트는 필수다. 150년간 전통을 이어온 잘라티모(Zalatimo Sweets)는 간판도 없는 곳이다.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 순식간에 종이장처럼 얇게 펴는 주인장의 날렵한 손놀림을 보는 것은 눈의 호사였다.


4개의 구역 중 가장 큰 무슬림 지구. 이 곳에는 무슬림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무슬림이 소유했던 건물을 매입하여 살고 있는 유대인도 상당수라고 하니 놀랍다. 기독교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의 일부 처소도 무슬림 지구에 있다. 예루살렘의 랜드마크이자 무슬림의 성지인 ‘바위 돔’과 알 아크사 사원 역시 무슬림 지구의 하이라이트이다.


크리스천 지구(Christian Quarter)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크리스천 지구’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곳에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성지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과 무덤 위에 세워진 ‘성묘교회(The Church of Holy Sepulchre)’다. 기독교를 용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 곳에 최초의 교회를 건설하였다.


모든 기독교인의 성지인 성묘교회. 그러나 교회 내부로 들어서면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어수선한 느낌과 왠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이 함께 느껴진다. 배경을 알고 보니 이해가 되면서도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성묘교회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에서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갈등이 잦았다. 1853년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은 각 종파별로 구역을 나눠 교회를 관리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몇 세기 동안 이미 터를 잡고 있던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넓고 중요한 장소들을 맡았고, 시리아 정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 그리고 이집트 콥트교는 작은 구역을 관리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 칙령으로 확립된 ‘현상 유지(Status Quo)’ 정책은 ‘현재의 관할권을 인정하고 더 이상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 구역을 차지한 종파들은 사소한 일로도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라고 한다. 서로 정해진 예배시간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관할권을 일부 침범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집단폭력까지 발생했다. 관할권이 아닌 곳은 청소도 하지 않으며, 보수를 해야 하는 부분이 생겨도 합의가 되지 않아 방치된 채로 있다. 교회 입구의 2층 오른쪽 창문 밑에는 나무 사다리 하나가 외벽에 걸쳐져 있다. 칙령이 발표되기 전해인 1852년에 발견되었지만 누가 두고 갔는지 알 수 없어 아무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섯 종파의 그 누구도 사다리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으며 160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 있는 이 사다리는 ‘부동의 사다리(Immovable Ladder)라 불린다.



교회의 열쇠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신앙인들의 세속적인 욕심에 관한 내용이라 씁쓸하다. 교회 현관문의 열쇠는 7세기부터 두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기독교도가 아닌 무슬림 가문이다. 다른 종파에서 열쇠를 맡는 것에 반대를 하며 다툼이 잦자 7세기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이슬람 칼리프는 제삼자인 무슬림 가문에 열쇠를 관리하게 하는 방안을 내었다. 기독교의 모든 종파는 찬성하였고 지금까지 무슬림 가문에서 교회 문을 지키기에 이르렀다.


아르메니아인 지구(Armenian Quarter)

아르메니아인 지구는 4구역 중 가장 작다.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그 종교를 믿는 유대인과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구역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에 위치한 작은 나라 아르메니아와 예루살렘의 상관관계는 뭘까. ‘아르메니아’라는 이름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자리 잡고 살게 된 배경은 뭘까.


아르메니아는 인구 300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르메니아는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보다 앞선 일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오는 아르메니아 성직자들과 성지순례를 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성 야고보 수도원을 중심으로 점점 아르메니아인들이 모여들었고 아르메니아인 지구는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인 지구의 최대 성지는 ‘성 야고보 교회(Cathedral of St. James)’이다. 외부는 특별한 장식이 없지만 내부는 아름다운 타일로 꾸며져 있다.


예루살렘에서는 아르메니아의 전통 도자기와 아름다운 타일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아르메니아 도자기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아랍인들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아르메니아 도자기 공방은 몇 군데 밖에 없다. 크리스천 지구에 있는 공방에 예쁜 타일을 구매하러 들어갔다가 주인의 안내로 도자기 제작 과정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위임통치하던 시절, ‘바위 돔’ 사원의 타일을 개조하기 위해 터키에 거주하던 3명의 아르메니안 장인을 초빙했다고 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공방을 차렸지만 기금 부족으로 프로젝트가 완료되지 못하자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도자기와 타일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교한 기술은 대대로 전수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크리스천 지구의 카라카시안(Karakashian) 공방도 그중 하나이다.


현재 주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서 전승된 기술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 곳곳에서 남아 있다. 벽에 붙어있는 도로명 타일은 그들의 작업이다. 1차 중동전쟁 이후 예루살렘을 통치한 요르단은 그의 아버지와 삼촌에게 아랍어와 영어로 도로명을 넣은 타일 작업을 의뢰했다. 이후 3차 중동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그 위쪽에 히브리어를 추가해 달라고 했다. 두 부분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프레임에 세 언어로 만들어진 타일은 1967년 이후의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꿋꿋하게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온 조상과 아르메니아 도자기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긴 타일은 기념품으로 소장할 가치가 충분했다.



유대인 지구(Jewish Quarter)

유대인 지구의 첫인상은 다른 지구보다 깨끗하고 현대적이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도 따스한 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지구의 가게에서와는 달리 메뉴나 간판이 히브리어로만 적혀 있는 곳이 많았다. 까다로운 입국심사 때 느꼈던 이방인에게 친절하지 않고 호의적이지 않은 유대인에 대한 나만의 선입견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스만 제국의 점령을 받던 당시에는 유대인끼리만 모여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무슬림 지구에도 유대인이 살았고, 유대인 지구에도 무슬림이 살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자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각 공동체별로 따로 살기 시작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시,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요르단은 유대인 지구의 유대인을 전부 쫓아냈다. 1967년 3차 전쟁 때 예루살렘을 탈환한 유대인은 유대인 지구에 살던 약 6천 명의 아랍인을 몰아냈다. 뿐만 아니라 700년간 이웃으로 살았던 모로칸 지구(Moroccan Quarter)의 주민까지도 내쫓은 후 그들이 살던 집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광장을 만들었다. 유대인의 성지인 서쪽 벽(통곡의 벽) 앞에는 수천 명이 기도를 하거나 행사를 할 수 있는 공터가 있는데 이때 만들어진 광장이다.


우리가 서쪽 벽을 방문했던 날에는 특별한 기념일인지 엄청난 인파가 모여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고 있었다. 유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어디 있으랴. 서쪽 벽은 때론 영광의 자리였고 때론 수치와 오욕으로 물든 곳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폭력과 전쟁은 악순환되기 마련이다.


유대인 지구에는 시나고그(Synagogue)라 불리는 유대교 회당들이 있다. 후르바 시나고그(Hurva Synagogue)는 18세기에 건축되어 파괴와 재건을 반복한 곳이며 유대 공동체의 심장이라 불린다. 로마 시대에 남북을 연결하는 제일 큰 도로였던 카르도(Cardo) 유적도 둘러볼 만하다.



**무슬림 지구의 성지 ‘바위 돔’ 사원, 크리스천 지구의 성지 ‘비아 돌로로사’ 그리고 유대인 지구의 성지인 ‘서쪽 벽(통곡의 벽)’에 대한 이야기는 본 매거진 18화 ‘예루살렘, 순례자가 아니어도 걷게 되는 길’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https://brunch.co.kr/@geunyoungkoh/55



예루살렘에서의 5박 6일 일정이 끝난 우리는 다마스쿠스 게이트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텔 아비브 공항까지의 요금을 흥정하고 짐을 실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파는 예루살렘 베이글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먹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린 기사 아저씨는 길 가에 차를 세웠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빵이 걸려있는 가판대로 갔다. 잠시 후 그는 커다란 빵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우리가 돈을 지불하려 하자 한사코 사양하며 선물이라고 했다. 야생 향이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자타르 가루에 찍어 먹는 빵은 꿀맛이었다.


공항 입구에 진입하자 이스라엘 군인이 차를 세웠다. 기사의 얼굴을 보더니 면허증을 달라고 한 뒤 차 트렁크를 열라고 지시했다. 아저씨는 순순히 따랐고 군인은 짐을 검사했다. 우리에게 국적을 묻고 여권을 보자고 하더니 가도 좋다고 했다. 아저씨는 백미러를 통해 살짝 긴장한 우리를 보더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이스라엘 군인에게 검색을 당하는 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자신이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분은 공항 보안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유대인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였다면 깐깐하게 굴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이젠 익숙하다고 말했다. 마음이 짠해진 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아저씨에게 힘이 돼줄 만한 말을 찾고 있었다. 우리가 마땅한 말을 찾기 전에 아저씨는 담담하지만 힘을 주어 말했다.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아랍어의 인사말은 ‘살람 알라이쿰(Salaam alaikum)’이다. ‘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 빈다는 뜻이다. 헤어질 때도 쓰는 인사말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아저씨에게 ‘살람’이라고 했다. 내 마음을 이해한 듯 아저씨는 미소를 지었다. 유대인의 인사말 ‘샬롬(Shalom)’도 살람(Salaam)과 어원이 같다. ‘평화’라는 뜻이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 모든 사람이 바라는 완전한 평화가 온다면 ‘평화’를 기원하는 그들의 인사말도 그때서야 진정으로 평화롭지 않을까.



텔아비브 공항의 출국 심사는 입국 심사 못지않게 까다롭고 복잡했다. 또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말끔히 사라질 만큼 여행자를 지치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하다. ‘평화의 도시’ 위로 가득 낀 먹구름은 언제 걷힐 것인가. 마음속으로 ‘살람’과 ‘샬롬’을 번갈아 되뇌었다.


**지금까지 고근영의 매거진 '알수록 매력만점, 중동속으로'를 구독해 주신 애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여행 매거진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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