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암만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나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다음 목적지로 어디를 갈 것이냐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 두 가지 질문은 현지인과 여행자를 이어주는 접점이며 처음 만난 이방인끼리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내가 살아온 세상과 시간을 돌아보는 일과 같다.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미 다녀온 사람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듣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점검해 보는 일은 우리네 삶에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던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을 여행은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질문으로 현지인과 가장 긴 대화를 나눈 곳은 요르단 암만에서였다. 우리가 머물던 숙소에서 길을 건너면 여러 가지 말린 견과류며 허브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예쁘게 진열된 상품들이 눈에 띄어 잠깐 구경하러 들어갔다. 대개 가게의 주인이나 점원은 손님이 필요한 것을 물어보거나 상품을 팔기 위한 대화를 시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을 와합(Wahab)이라고 소개한 점원은 달랐다.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한 그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고,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다음 질문은 남한인지 북한인지로 이어지는 것이 정형화된 순서인데 와합의 질문은 색달랐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는데 질문을 해도 괜찮은지부터 물었다. 젊은 친구는 예의 바르고 진지했다. 전쟁으로 갈라진 남한과 북한은 같은 형제였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전쟁 중에 헤어진 가족끼리 만남은 이어지는지, 서로 왕래가 가능한지 궁금해했다. 생사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방문이나 왕래도 불가능하다는 말에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우리가 궁금해졌다. 전쟁이나 이산가족 문제는 밝고 환한 미소를 지닌 젊은이가 호기심을 가질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와합은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팔레스타인에서 살아왔는데 중동전쟁 때 하루아침에 난민 신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집과 땅을 뺏기고 맨 몸으로 쫓겨나 요르단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다. 생활력이 강했던 그의 할아버지는 다행히 암만에서 자리를 잡았고 가족들은 요르단 국적을 얻게 되었다. 지금 그는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
고향이 아무리 그리워도 그의 가족은 고향에 갈 수가 없다. 이스라엘 입국 비자 신청이 번번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계 사람들은 요르단 국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스라엘 비자를 신청할 때 내야 하는 까다로운 서류에 출신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이들에게 입국을 불허하는 것이다.
요르단에서 태어난 와합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나라에 가본 적이 없다. 그의 꿈은 언젠가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할아버지의 고향에 가보는 것이다. 그는 물었다. “도대체 전쟁을 왜 해야 하는 건가요? 민족과 종교가 달라도 다 같이 모여 살면 안 되는 건가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것이 역사라지만 팔레스타인만큼 험난한 역사를 가진 곳이 또 있을까. 지정학적 역사로보면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의 땅과 그 인근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지역이다 보니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 탐을 내던 곳이었다. 세계 열강들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던 지배자는 계속 바뀌었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유혈 분쟁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600년대에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래 이 지역은 1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랍인의 터전이었고 인구의 94%가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묵인해 주었고, 현지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커지자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제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환영했지만 아랍인들은 반대했다. 당시 인구 비율에서 전체 면적의 7%를 차지하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를 분할한다는 내용은 아랍인들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
* 지도 : 맨 왼쪽 1948년부터 맨 오른쪽 2000년까지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영토의 변화. 녹색은 팔레스타인, 흰색은 이스라엘.
1948년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치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에 근거해 재빨리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으며 미국은 즉시 이를 승인하였다. 이스라엘 건국에 반발한 아랍 연맹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무기와 군사력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초 유엔의 분할 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1967년 사이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주변 아랍국가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해 귀환을 막았다. 이스라엘은 1차 중동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 전 영토의 78%를 차지하게 되었고, 3차 중동전쟁을 통해 나머지 22%인 가자지구(Gaza Strip)와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 그리고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는 완전히 철수했지만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아직까지 절반 가량을 점령하고 있다.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고 있으며 높은 분리 장벽 설치를 강행하고 있다.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서안지구에는 이스라엘군이 곳곳에 상주하고 있다.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수립되어 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이 지역에 남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 장벽과 이스라엘 군의 통제하에 ‘지붕 없는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2017년 12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한다고 선포했다. 유엔의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 당시 예루살렘은 국제법상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으로 선포되어 있었다. 트럼프의 결정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정착 구도인 ‘두 국가 해법’을 외면하고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준 거나 마찬가지다.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은 치열한 분쟁 끝에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나온 중재안으로,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을 반환하고 팔레스타인이 주권국가를 건립한다는 취지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각각 국가를 건설하여 두 국가가 더 이상 분쟁이 없도록 하자는 해법이었다. 그동안 더 나은 대안이 없었던 ‘두 국가 해법’은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으로 최악의 위기에 처했고 팔레스타인의 미래는 어두워 보인다.
암만 시내를 걷다 보니 화려한 색상의 드레스가 걸려있는 가게가 눈에 많이 띄었다. 요르단 의상인 줄 알았는데 대개는 팔레스타인 전통의상이거나 팔레스타인 전통 자수기법에 영향을 받은 스타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상점 주인들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는데 194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난민으로 건너와 요르단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가게에 걸려 있는 수많은 드레스는 암울한 팔레스타인의 미래와 대조되어 화려하면서도 슬픈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