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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지우 Apr 21. 2023

나만 긴 겨울을 나는 것 같다면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는 그냥 걷는다. 걷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무목적 무방향으로 걷는 순간을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걸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는 셈이다.


살아있니?


겨울나무들은 가지만 남아 있으니 전문가가 아닌 이상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다. 봄이 오면 푸르른 잎과 화려한 꽃을 피우며 자기의 이름을 찾아가는데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산책할 때 만나는 이 나무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에도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갈색 잎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아파트 단지를 에워싸고 벚꽃 나무를 많이 심어 놨는데 벚꽃이 필 때면 황홀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 나무 아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4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채 떨어지지 않은 갈색 잎과 아직은 가지가 더 많이 보이는 이 나무에는 눈길 주는 이가 없었다. 이 나무는 마주 보고 서 있는 벚꽃이 부러웠을까?


사실 최근까지도 나는 이 나무가 죽은 줄 알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과거에 나는 벚꽃처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 없는 나무로 사는 게 답답했다.



내가 하는 일≠나 자신


흔히들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가 다르다고 한다.

식물은 각자의 생존 방식으로 계절을 살아낸다. 화려한 꽃을 피운 뒤 금세 떨어지는 벚꽃 나무가 있는 반면 저 나무처럼 봄이 와도 죽은 나무 마냥 갈색 잎을 달고 있다가 뒤늦게 잎을 틔우는 나무도 있다. 보통은 가을이 되면 겨울 준비를 위해 잎을 다 떨구는데 왜 갈색 잎을 달고 긴 시간을 보낸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무의 세계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생존한다. 꼭 꽃을 피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일이 없는 상황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는 책 <인생의 태도>에서 자아상을 외부의 것(직장, 돈, 가족 등등)과 연결시키면 언젠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자신의 일부도 잃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뭔가를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하는 일로 평가나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타인을 하는 일로 판단하는 경계했는데 정작 내 자신은 일 좀 안한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외부적인 것들이 내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저 나무의 이름은 플라타너스다. 10월 중순. 맞은편 벚꽃 나무는 가지만 남았는데 이 나무는 제법 많은 잎이 달려있다. 


나무마다 자신의 생존 방식이 있다면 나도 내 생존 방식대로 살고 있다. 나는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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