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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지우 May 07. 2023

현관문 옆방은 이제 거부합니다!!

K-장녀입니다만...

나는 K-장녀다


'현관문 옆방은 K-장녀 방이다'

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때 금방 이해가 안 됐다. 요즘은 단어에 한국을 뜻하는 K를 붙이는 경우가 많으니 한국의 장녀라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현관문 옆방인 걸까?

현관문은 집 안에 사람이 오가는 소리가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들리는 공간으로 현관문 옆방은 가족의 중재자이자 가족 대소사에 과도한 책임을 느끼는 K-장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면이 있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3살 터울의 남동생이 하나 있다. 흔히 밑에 남동생이 있거나 위로 오빠가 있으면 '남녀차별'을 겪게 된다고 하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네가 누나니까 동생한테 모범을 보여야지"라든가, "왜 동생하고 똑같이 굴어?"라는 말은 들어본 것 같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타입은 아니어서 특별히 억눌린 감정을 갖고 산 것 같진 않은데 K-장녀들의 하소연(?)을 읽고 보니 그동안 내가 느낀 불편했던 감정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엄마는 신사임당이 아니었다


신사임당이 좋은 어머니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훌륭한 여성이지만 아들인 율곡 이이 선생의 입장에서도 완벽한 어머니였을까?


좀 웃기지만 30대까지 마음속에 '바람직한 엄마상'이 있었다. 인자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엄마가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희생을 눈으로 보았는데도 나는 왜 그런 터무니없는 엄마상을 그렸던 걸까?


우리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셨고 자주 다투셨다.

다투는 소리가 들리면 내방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같은 성별인 엄마의 힘든 마음에 공감했고 엄마를 웃게 해 드리려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엄마는 내가 딸이고 첫째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는데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무력감과 부담감을 떠안은 채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평소 나는 엄마와 여행도 다니고 영화도 같이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닌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만 가끔은 엄마의 얘기를 들어주기가 힘들 때가 있다. 과거 얘기가 나올 때면 엄마의 하소연이 쏟아지는데 엄마를 다독이는 과정에서 의식하지 못한 감정이 불쑥 올라와 말다툼으로 번진다.


"나 그때 힘들었어"

"네 동생은 그런 말을 안 하는데 왜 너만 그래?"

엄마의 이 말은 나에게는 도화선이 된다

'힘든 얘기는 나한테만 했잖아.'

40이 넘어서까지 엄마랑 싸우는 게 믿기지 않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와서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 좋을 게 없고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 안의 상처받았던 자아가 소환된 것이다.


마음의 괴로움은 부모의 불화에 기인하지만 스스로가 엄마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하면서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었다.

늦었지만 독립을 결심하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젠 거리를 좀 두고 싶어"


나는 성장과정에서 겪는다는 사춘기를 겪지 않고 성인이 되었다. 사춘기는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한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겪게 되는 과정인데 나는 그냥 지나간 것이다. 사춘기를 겪어야 하는 시기를 조용히 넘어갔다고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내 경우 30대 후반부터 혹독한 사십춘기를 겪었다. 


"엄마, 내가 엄마 왕비 만들어 줄게"

우리 엄마는 가끔 이 얘기를 꺼내시면서 언제 왕비 만들어줄 거냐라고 하신다. 사실 엄마가 내게 무언가를 크게 기대하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어린 딸의 기특함이 생각나 꺼내신 말인데 나는 기분이 묘하다.

"엄마 왕비 안 만들어 줘도 돼. 엄만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라고 말해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올해 초 더 이상 엄마의 하소연은 듣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하소연을 또 하면 멀리 떠나겠다고 했다.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앞으로는 너한테 하는 말을 좀 아끼려고. 엄마 곁에 있어 줘서 고맙고 미안"

"들어보니 네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이제라도 내 딸 마음을 풀어줘야지"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엄마와 말다툼을 한 적이 없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었다. 엄마와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게 관계를 오래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한 말이 내 도화선을 영원히 잠재운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장녀로 살아왔고 장녀가 떠안은 역할 부담과 문제의식에 대해 상당 부분 공감하지만 K-장녀가 내 정체성이 되는 건 거부하고 싶다. 

우린 자식이니까 자식 입장에서 기대하는 부모의 바람직한 모습이 없을 때 서운함을 느낄 수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장녀뿐 아니라 장남도, 둘째도 막내도 전국에 수많은 금쪽이들이 있다. 그러나 애쓰셨지만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 서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상처받은 금쪽이로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 아무 말 못 하고 현관 옆방에서 숨죽여 다툼 소리를 들었고 엄마의 정서적 공감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의견을 말하고 협조를 구할 수 있으며 설령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늦었지만 정서적으로 독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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