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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진문화연구소 Oct 13. 2020

[18호] 중랑천 프로젝트


Life | 중랑천 프로젝트

강종길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중랑천은 청계천 물줄기가 한데 섞여 서쪽으로 꺾어 한강으로 흘러간다. 하루는 물이 흐르는 하류를 따라 성수동으로 내려가고, 또 하루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이 맞바람을 맞으며 양주시를 향해간다. 물굽이를 따라 자전거길과 도보길이 나란히 나있어 좌우로 물결의 파동을 즐길 수 있다. 공자가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하듯,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물살에 매료되어 한순간 관조하는 태도로 돌변하여 물살의 속도처럼 자전거 바퀴 구름의 횟수를 줄여본다.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고,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며, 아름답지도 추악하지도 않으며 쓸쓸하거나 화사하지도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다.’ 공자의 말을 닮아 있는 김훈의 언어처럼 중랑천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독백과 같은 사색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세 명의 작가가 군자동에 위치한 ‘작업실’을 함께 공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중랑천’이라는 장소를 사유할 수 있는 교집합이 생겼다. 작업이 잘 안 풀릴 때, 고민이 있을 때, 콧바람을 쐬고 싶을 때 등 쉼을 위해 수시로 찾았던 중랑천이지만 오히려 투철한 직업 정신이 발동하여 그 사이에 우리는 이런저런 작업의 소재를 찾곤 했다. 어느 날부터 세 명의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을 오르내리면서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일반적인 주변 풍경을 수집하고, 그 이미지에 흔한 질문을 던지며 각자가 사색하는 중랑천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저 강물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새는 어디서 날아왔지?’ 등의 사색적 의문을 해소하고자 그 순간, 이미지의 실마리를 통해 사건을 추적하고 상상함으로써 의도적이고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만든다. 세 명의 관찰자가 바라본 군자의 중랑천과 그들이 상상하는 순수한 노스탤지어는 과연 무엇일까?


                                           중랑천 프로젝트, 각 30×30cm, Oil on canvas, 2020

                                                               좌부터 강종길, 박해선, 이병철


중랑천에는 자연적으로, 인공적으로 아름다운 물결이 있다. 한때 청계천과 더불어 하천 오염이 심했던 터라 그런지 하수처리장이 잘 구비되어 있어 수질이 많이 개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만 되면 내리 쬐는 태양 에너지를 양분 삼아 쑥쑥 자라는 수중식물이 물때처럼 즐비하다. 하천의 유속이 광선의 내리쬠보다 느린 탓이다. 덕분에 낮에는 초록 물결을 밤에는 가로등 색을 입은 주황 물결을 즐길 수 있다. 또 어떤 곳은 파란 가로등으로 인해 세루리안 블루 물결을 볼 수 있다. 녹조의 살랑임에 출렁이는 쌀알 같은 반짝임도 절정을 이룬다. 강종길은 이렇게 광합성을 즐기며 산소방울을 터트리는 중랑천의 물결을 바라보고 바람의 소리와 그를 타고 흐르는 물결의 부딪힘을 그린다.      


박해선은 자연과 인접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현재 도심에 살게 되면서 사색하는 시간이 줄었다고 한다.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바뀌어버린 사색의 시간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의 일환으로 자연스럽게 자연의 이미지를 수집하는데, 흙 위에 흩어진 이파리, 나뭇가지 파편, 떨어진 꽃잎, 빛의 흔적 같은 것들이다. 일반적으로는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거나 소리 소문 없이 곧 사라질 것들을 예민한 관찰력으로 조용히 들여다보며 이미지를 수집하고 화면에 옮김으로써 잠시나마 그것들의 흩어짐을 유보 시키고, 작은 것들을 위한 따듯한 공간을 제공한다.      


이병철은 낯선 환경에서 마주치는 사물에 대한 인식적 불투명성과 답답함에 대한 고찰을 화폭에 담는다. 세 명 중 가장 최근에 군자에 터를 잡은 터라 나름 낯선 중랑천에서 잘 조성된 화단과 조경에 대한 흥미로움을 신선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생태공원들은 대부분 인간의 의도적 손길로 만들어졌기에 눈에 보기에는 좋지만 자연적으로 나고 자란 수려한 자연물들에 비하면 자연스러운 매력이 덜 하다. 그는 잘 꾸며진 공간에 심긴 식물에 시선을 온전히 투영시키지  못하는 비닐을 씌움으로써 깨끗하고 투명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차단시키고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세 작가의 시선과 조형 언어로 표현되는 중랑천의 모습을 한곳에 두면 같은 듯 다른 바라봄의 시선과 사색의 흐름, 다르면서도 같은 표현의 진실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작가가 화면을 대하는 태도는 진실 되어야 한다.’는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말을 밥 먹듯 하는 친구들이 곁으로 와서 순수한 태도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을 공유하는 요즘이다.      


“좋은 예술가는 생각하는 사람이며 예술의 언어로 생각을 해석하는데 능숙합니다. 그냥 작업을 하세요.”라고 말한 쉬빙(Xi Bing, 1955~)의 충고처럼, 그레고리 아메노프(Gregory Amenoff, 1948~)가 “예술 안에서의 삶은 장거리 경주이지 스프린트전이 아닙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어 주듯이, 우리는 조금은 느린듯하지만 고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작업으로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가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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