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하기

by 고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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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을 따라한다는 것이

오히려 내 것을 한다는 것보다 어려운가보다

사진을 보고 흉내내기 그림을 그려보지만, 전혀 다른 모습들이 새롭게 나오니

이번 그림은 시크한 모델을 저승차사로 만들어 버린 듯 ㅜㅜ

1년전에 구매한 색연필들도 몽당이 되 버리면서 몇개 남아 있지 않아 색의 선정도 한정적이 되가고

새로이 구매하려니 내 수준에 뭘 하는 생각에 그냥 있는 걸로 색을 맞추어 보고는 한다

때론 색연필로, 색연필에 그 색이 없으면 마카로, 때로는 물감으로도

방학중 아들이 들어왔을 때, 아빠가 얼마나 더 일하면 좋겠니를 물어보니

아빠는 진료실을 벗어나면 빨리 늙을 거 같다며 아주 오랫동안 진료실에 앉아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오시는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경제활동을 하는 의사가 아닌

그냥 진료실이라는 놀이공간안에서 놀라는 답을 한다

하긴, 평생을 머문 곳이 진료실이니 아마도 거꾸로 진료실이 나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No Kid Zone이 유행한다던데, 나중 나도 노 환자존의 진료실을 만들어서 수다방으로 만들까? ^^

오래된 환자분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늙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도 싶다

그 분들만큼 날 인정해주고, 편하게 대해주고, 또 그 분들을 이해해주는 닥터도 많지 못할테니

한 친구가 몇년전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병원 한 컨에 진료실을 내어 같이 진료하는 사진을 보내온 적이 있다. 부러움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내 두 아이의 꿈에 내가 간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그 들은 그 들의 삶일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혹여라도 있다면 도움이나 조언을 청할 때 몇십년 먼저 온 한 사람으로서 대화를 나누어주는 것이어야겠지. 말은 쉽지만, 사실 맘과는 달리 아직은 잔소리가 뒤따르고, 또 이어 후회를 하게 되고를 반복하게 된지만...

따라한다는거

융의 철학중에 이런 문구 하나가 있다

대학시절 접했던 두 철학자, 프로이드와 융, 둘은 같은 시대 또 활동도 같이 시작했지만 서로의 주장과 생각이 달라 멀어졌다고도 들었었다. 웬지 모르게 난 융에 매우 끌렸었는데, 융의 책, 영문으로 된 책이었기에 그 번역과정엔 솔직히 내 사적 감정이 들어가 있었음을 거부하긴 어렵다. 융은 그림자 이야기를 많이 응용했었다. 그림자는 움직이는 사람을 따라오기에 난 내 그림자의 움직임에게 책임을 가진다, 그럼에도 우린 수동적이고 오히려 내게 의지하기만 하는 그림자에게 때론 의지하려하는 건 아닌가를, 물론 융이 말한 그림자는 빛의 뒷편에 비추어진 어두운 내 그림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삶에 내가 주인이고 내가 정해야하고, 내가 책임지며 가야할 길위에서 때론 나약하게 나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싶고, 뭔가에 의지하고 파할 때가 수시로 다가온다. 때론, 제 3자의 판단과 결정을 바라면서도 자신의 이해득실을 먼저 고려하게 되고, 누군가의 조언의 청함에 깊은 생각없이 답을 줄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건 아니었을까? 내겐 내 그림자를 책임질 의무가 있음을

반대로 날 사랑하는 그림자에게 의지를 한다해도 그 그림자가 내가 가야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어도 다른 길로 들어서며 끌려오는 내 그림자를 울게 하는 건 아닐까?

내가 내 그림자라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참 편한 세상이 되었다.

찍었다 지우고, 또 쉽게 찍고

예전 필림 카메라를 쓸 때는 종로 3가였던가 한 골목에서 큰 롤로 된 필림 뭉치를 사서 암실에서 빈 필림통에 돌려 채우고는 했었고, 한 장 한 장을 현상하고 인화를 했었기에 쉽게 찍고, 맘에 안든다 해서 쉽게 버리지도 못한채 아쉬움에 잡고만 있었는데...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한 번 칠해진 색연필, 물감, 마카는 지워지지 않고, 어렵게 그린 엉터리 그림을 차마 찢지 못하고 책꽂이에 꽂아두게 된다.

내 아이들이지만, 날 따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예전 조금 더 나도 젊고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바보처럼 나와 아이들을 비교하며, 내가 너라면... 늬가 이렇게 해 주면 참 좋으련만 하는 생각과 말을 했었지만, 그 만큼 아이들에게 상처가 됐을거고, 또 나에게도 나 스스로 상처를 주었지 않았었을까? 그 들의 삶은 그 들의 것일 뿐, 이제와 생각해 보면 너무 깊이 아이들의 삶속에 들어가 있었던 건 아닌지 이제 내게 남은 시간동안 아이들에게서 빠져나와 그 들의 길위에 스스로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되기를 곁에서 나마 바라보련다

이십대 후반이 다 되 가는 딸도

이십대 중반이 되가는 아들도

결정할 것이나,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를 주어 뭘로 하지?를 묻는다

이젠 그 아이들에게 책임의 의미, 실패후 스스로 추스릴 수 있는 경험과 힘을 접하게 해 줄 때가 됐는데

아내의 눈에는 아직 모두가 다 십대이전의 아이들로만 보이는지, 무언가를 말하면 아직 애들인데를 반복하니... 하긴, 나 없으면 아내의 보호자는 내 아이들이 되겠지? 나이들어도 아이를 아이로 보는 아내의 눈과 마음도 아빠와 엄마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어른으로 느끼면 아마도 아내의 가슴 한 컨속 많은것들을 잃게 될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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