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68세가 된 할머니 정임. 정임의 젊은 시절은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갔지만, 은퇴 이후의 하루는 끝없는 오후처럼 느리게 이어졌다. 집 안에만 머무는 시간이 답답하게 느껴져 아침마다 하릴없이 동네 산책을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 말로 ‘루틴’이 되어가던 어느 날, 주민센터 게시판에서 눈에 띄는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편지 할머니·할아버지 모집합니다.”
편지 할머니·할아버지 아르바이트인 <편지할게요>는 퇴직 노인의 사회 참여와 정서적 돌봄이 필요한 아동의 심리 안정을 한 번에 지원할 수 있는 세대 연결 프로젝트로 맞벌이와 한부모 가정이 증가하는 사회 추세에 따라 애정 결핍, 사회성 저하 등 아이들의 정서 관련 문제가 대두되면서 65세 이상 노령인구와 정서적 지원이 필요한 아동을 지자체에서 매칭하여 월 4~6회 편지를 주고받는 지역 노인 대상 일자리이자, 아동 정서 안정을 위한 상호 보완적인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지 발송에 필요한 우표는 개별 지급되며 노인 참여자는 편지 1건당 5,000원의 지원금을 월 최대 30,000원까지 수령 가능하고, 참여 아동은 글쓰기 및 공감 능력 향상, 편지를 주고받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멘토 관계 형성으로 정서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편지할게요>는 심심한 일상을 채워 줄 소일거리가 필요했던 정임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정임은 오랜만에 잔잔한 호기심을 느끼며 신청서를 써냈다. 얼마 후 <편지할게요>의 노인 참여자가 된 정임에게 배정된 첫 일거리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짤막하게 쓰인 성의 없는 편지 한 장이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편지를 잘 안 써봐서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숙제라서 보내요.” - 지윤
정임은 지윤의 편지를 받고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는 돈 벌려고 보낸다. 우리 오늘부터 잘해보자.” - 정임
그렇게 첫 답장을 쓰며 정임이 새롭게 생겨난 일상에 대한 기대를 부푸는 것도 잠시, 지윤은 좀처럼 편지에 흥미를 붙이지 못해 지루해하는 듯했고 정임은 지윤과 친해지려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를 배워보거나 이름도 외우기 힘든 연예인들 이야기를 꺼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정임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는데, 첫 번째는 지윤에게 평소 거슬렸던 이웃 할머니의 험담을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주민센터에서 목격한 <편지할게요> 담당 직원들의 사내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어색한 사람과 친해지기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둘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므로. 그러자 지윤도 야금야금 자신의 학교생활 이야기를 편지에 적어 보내기 시작했다.
지윤의 편지는 점점 달라졌다.
“할머니, 저 사실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잘 못 놀아요. 쉬는 시간마다 그냥 엎드려 있었는데, 이제 할머니한테 편지 쓰면 되니까 좋아요.”
정임은 지윤의 편지를 읽고 한참을 고민하다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답장을 썼다.
“지윤아, 쉬는 시간에 혼자 있으면 심심했겠구나, 그럼 우리 쉬는 시간에 같이 그림 그릴래?”
지윤이 받아 든 편지봉투 안에는 정임이 직접 그린 작은 그림이 들어있었다. 꽃과 나무가 가득한 작은 정원의 밑그림이었다. 가운데엔 색칠할 자리를 남겨둔 벤치가 있었다. 며칠 뒤 도착한 지윤의 편지에는 그 작은 정원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 제가 벤치에 앉은 사람 그려 넣었어요. 이건 저예요. 할머니도 옆에 앉아 계신 거 그려주세요.”
정임은 편지를 읽자마자 지윤이 앉아 있는 벤치 옆에 자신을 앉혀두었다. 이후로 두 사람은 편지와 함께 한 조각씩 이어지는 그림을 주고받았다. 정원에는 점점 나무가 늘고, 고양이가 나타나고, 하늘에는 구름도 떠다녔다. 편지를 통해 둘만의 작은 세계가 완성되어 갈수록, 지윤은 점점 덜 외로웠고, 정임은 점점 더 바빠졌다. 정임은 매주 편지가 오는 날이면 설거지도, TV도 잠시 잊고 편지봉투를 먼저 열었다. <편지할게요>는 더 이상 단순한 숙제나 용돈벌이가 아니라 두 사람만의 놀이이자 하루의 활력소가 되었다.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며 주고받는 그림이 점점 많아졌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강아지가 앉아 있고, 가을에는 빨간 단풍이 날리고, 겨울엔 벤치 위에 눈이 쌓였다. 두 사람은 계절을 따라 그림 속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듯했다. 우연히 정임과 지윤의 그림을 보게 된 주민센터 직원의 제안으로 둘은 주민센터 내 작은 공간에서 ‘함께 그리는 편지’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기로 했다. 전시가 열리는 곳에는 정임과 지윤이 주고받은 편지와 그림을 시간순으로 함께 걸기로 했다.
전시회 준비를 위해 처음으로 만나게 된 지윤은 멀리서 걸어오는 정임을 발견하자 쑥스러워하다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편지를 하는 동안 단 한 번의 만남도, 생김새를 가늠할 수 있는 사진 한 장도 주고받은 적 없는 서로였지만 정임도 지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손을 높이 들어 마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