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밝은 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14페이지.
이 책 『밝은 밤』을 펴들고 몇장 넘기지 않아 이 문단을 만났다. 동공이 여기에 멈춰서 나아가지 않았다. 너무 내 마음 같아서. 한 켤레 운동화를 매일 신는 사람 같이, 비가 온 다음 날에도 여전히 축축한 운동화에 발을 구겨넣고 양말에 스며드는 물기를 찝찝해하면서도 그냥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일상 같이. 퇴근한 어떤 저녁엔 친구들과 널부러져 누워 있다가 이 부분을 읽어 주기도 했다. 마음을 꺼내어 씻어 햇볕을 쬐어 주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뽀송해지는 것 같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86페이지.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것 같다. 괴롭고 어두운 시간 속에 있을 때에 나를 귀하게 대해 주는 마음 한 줄기가 촛불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밝힌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겨 주는 마음이건, 다른 이가 나를 귀하게 여겨 주는 마음이건. 마음이 다치고 어두워지는 순간은 정확히 반대라는 것이 공교롭다. 어두운 밤 같은 현실에서도 서로를 귀하게 여겨 주는 작은 빛을 품고 밤을 지나갈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말한다.
백정의 딸로 태어나,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위장결혼으로 평생을 살아간 증조모 삼천이. 증조부는 끌려가 죽을뻔한 그를 구해 아내로 맞았다는 영웅심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부와 자유를 속박당했다는 마음에 평생 자기 아내를 눈치보게 하며 산다. 백정의 딸이라는 수군거림, 남편의 못마땅해함, 가난한 삶 속에서 그에게 유일한 빛이 되어준 건 동년배의 새비 아주머니였다.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증조모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 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64페이지.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116페이지.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는 서로를 (문자 그대로) 살려냈고, 살게 했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아깝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동반해서 서로를 슬프게도 했지만, 그걸 다 알았더래도 결국은 사랑을 주고 아픔을 얻는 선택을 했을 거다.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더라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없어서 제로를 유지하는 삶보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요동치는 편이 낫다. 설령 그러다가 합계가 약간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새비야.
-응.
-내레 아까워.
-뭐가.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 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258페이지.
어떤 사랑은 우는 사람을 더 울게 한다. 울지 않겠다고 이를 앙물던 사람을 울게 한다. 상처받아 아픈 마음을 더 큰 사랑으로 쏟아부어 버림으로써, 조곤조곤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어떻게 소중한지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걸으면서 이야기해 줌으로써. 그렇게 한참 울다 보면 울음 끝에 사랑이 잔잔히 남아 눈물을 닦고 나아갈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102페이지.
하루는 학교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길모퉁이에서 울다가 새비 아저씨를 만났다. 당황해서 눈물을 닦는데 아저씨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할머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소중했는지, 할머니의 엄마가 얼마나 용기 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었다. 111페이지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220페이지.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할마이가
223-224페이지.
그러나 자식과 부모 사이에서는 왜 서로를 애틋해하기보다 상처주는 일이 많을까. 너는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까. 자라면서 아팠던 일들을 겪지 않게 하려고 길목 앞에서 자식을 막아서고, 자식은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굳이굳이 반댓길을 택하기 때문일까. 그것이 한 대를 건너 내려와 손주에게는 다시 애틋해지는 마음은 또 무얼까.
관계의 길을 한참 잘못 들어섰더라도 결국은 사랑이라 길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차마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는 사이. 그 상태에서 멈추어 건드리면 큰일날까 조심조심하는 사이. 서로를 너무 많이 상처입힌 부모와 자식 사이...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134페이지.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137페이지.
밝은 밤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내가 받은 사랑도 아닌데, 등장인물1이 등장인물2를 사랑하는 마음인데 왜 내 마음에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지. 두고두고 따수운 문장들이 마음에 남아 퍽퍽하고 답답할 때 다시 펼쳐보려고 인용을 많이 남겼다. 꼭, 읽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