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아들하나 있는 거 잘 되게 하려고 여기저기 닿는 인맥을 통해서 일 좀 해서 스스로 용돈이라고 벌라고 심어주기도 했지만 아빠의 체면을 구기고 며칠을 버티질 못하고 보따리를 싸 뛰쳐나왔다.
어릴 때 사고로 명을 달리할 뻔 한 오빠를 아빠가 불쌍히 여겨 살아만 준 걸 고맙게 생각하신 건지 장남이라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살라고 외국유학도 다 보내주고 키워놨지만 제 밥그릇도 못 챙기고 반거충이가 되어 집옥상에 화실을 차려놓고 동네 코 흘리는 아이들 그림을 봐주고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부모님 눈엔 찰 리가 없지만 대기만성이라고 언젠간 뭔가 하겠지 하는 부모님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른이 넘도록 띵가띵가하며 철없는 한량으로 지내고 있다.
내놓으라 하는 미대 금속공예과를 졸업한 오빠는 외국물을 먹어서인지 영어는 기본 이탈리아어까지 어디에 내놔도 배운 티가 나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날까지 제대로 월급을 벌어 본 적 없고 자식 셋 낳을 때까지 부모 등쳐먹고 살아온 내 눈엔 아주 기생충 같은 인간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엄마가 안 되겠다 싶어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냐 해서 오빠에게
"네가 잘할 수 있는 게 뭐냐 그동안 여러 나라 다녀보니 뭘 느꼈느냐?" 하니
"다녀 본 나라 중에 젤 만만한 나라가 태국인데 그곳에 한국인상대로 여행사를 하면 먹고살 거는 같습니다." 하더니
92년 부모님은 방콕에 여행사를 차려주고 그곳에 가족들과 함께 독립을 하게 한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며느리라고 들어온 게 더 가관이다.
동네 목사님 주선으로 믿고 사귀고 있었는데 식도 올리기 전에 임신부터 해서 며느리를 탐색할 시간조차 없이 승낙을 하게 된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여자는 인간 말종이었다. 어릴 때 새엄마 손에서 장녀로 크면서 괄시와 천대를 친자식이 아닌 설움을 받고 자라서인지 손버릇도 안 좋고 눈치는 백 단이고 뒤만 돌아서면 탄로 날 거짓말을 앞에선 사실처럼 으시딱딱하게 큰소리치는 인간이다.
처음에는 그 정도일 줄 모르고 아직 어리니까라고 넘어가주기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좀 철이 들겠지 하고 시부모님들도 다독거려 주고 하나씩 가르쳤는데 입만 열면 거짓말에 부모님 카드를 제 것처럼 쓰지를 않나 결혼하기 전에 예비 시어머니를 사기를 칠 정도면 뻔할 뻔자의 인간이다
둘이 비슷한 인간들이 만났으니 저금은커녕 새끼들 셋 나을 때까지도 부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에 수저를 올려놓고 등골을 빼먹고 있었다.
그런 오빠가 사업을 말아먹고 한국에 들어와 이 집에 얹혀 살러 들어온다고 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엄마하고 짚고 넘어갈 거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 집 월세를 그럼 오빠가 벌어서 내야 할 텐데.. 가족들 생활비는 내가 도와줄 수가 없으니 그렇지..."
내가 말하자
"그건 오빠네 부부가 알아서 하겠지 방하나만 내주고 들어오라고 하자.."
엄마 아빠를 보살피는 일은 딸이 할 수도 있고 감수했지만 오빠네 다섯 식구를 내가 감당하기는 힘에 부쳤다. 내 딸아이들 호주 유학 후 나도 겨우 서울살이를 적응하고 살아가는 때여서 내 집이 없을 때고 아이들이 곧 들어오니 나도 따로 집을 얻어야 했고 두 집 월세에 엄마아빠 생활비에 오빠네가 나온다니 더 심란해졌다. 물론 사는 게 넉넉해서 집도 넓고 그렇다면 내 형제가 곤란에 처했는데 나 몰라라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방콕에서 오빠가 한 10년 동안 부모님을 모시고 산거는 맞지만 그 기반은 부모님이 다 해주신 거였고 어쩌면 부모님이 오빠를 거둬 준거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문제는 오빠네가 귀국하기 전에 엄마한테 드린 생활비 카드가 있다. 엄마 아빠 외출하셨을 때 쓰시라고 드린 카드다.
한 달에 50만 원에서 100 정도 엄마 아빠가 쓰시는데 오빠네가 나온 뒤로 100만 원이 훌쩍 넘어 200까지 나온다. 오빠네 식구까지 이 카드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카드값에 엄마 카드값에 내 월급이 나오면 카드값 막고 나면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다.
오빠네는 오빠가 벌어서 자기네 식구가 얹혀살면서 부모님을 봉양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귀국 한지 두어 달 지났을까?
어느 날 막내 이모가 전화가 걸려왔다.
"달래야, 네가 너무 힘들겠다. 엄마한테 카드 준거 네 조카가 들고 다니며 젤 좋은 걸로다가 먹고 쓰고 있는 거 아니?
라면도 그거 블랙인가 뭔가 그걸로 먹고 걔네들 왜 그렇게 철이 없니? 네가 봉도 아니고 너만 죽어라 일하고 네 엄마는 손주들 먹는 거고 하니 아무 말 안 하시는 것 같더라. 딸은 힘들게 일하는데 친선주랑 아들만 생각한다니..."
갑자기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왔다. 오고 갈 데 없어서 방한칸이라도 살게 해 주었더니 내 카드로 살고 있다? 딸 둘도 취업을 해서 월급을 받을 텐데 고모카드를 제카드인양 쓰고 있다니....
오빠도 새언니란 사람도 어디 가서 뭔가를 해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두 딸아이들은 한 달 월급 받아서 생활비라도 보태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리고 보니 지난달 월세도 안 들어왔다고 집주인이 전화가 와서 대신 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싶었다.
이모가 물론 내 형편 생각해서 전화해 주신 것도 고맙긴 한데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편했다.
오빠랑 새언니가 벌어서 살기로 하고 집까지 내주었는데 어째서 하나뿐인 동생 카드를 자기네 것처럼 쓰면서 미안해하질 않는 거지? 내 허락도 없이 마구 쓰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속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다.
"이것들을 그냥!!"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화부터 날 것 같아서 다음날 들려서 엄마한테 조용히 말씀을 드렸다,
"엄마, 내 카드 어디 있나? 유효기간 다 돼서 바꿔야 하는데 새 걸로 바꿔드릴게."
나는 연기파 배우처럼 엄마한테 거짓말을 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식구들이 다 있는 자리여서 더 속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한테 몰래
"카드 나오기 전까지 현금으로 엄마 필요한데 쓰셔~아빠 엄마 드시고 싶은 거 쓰셔"
하며 봉투에 생활비를 넣어서 드렸다.
이후로 엄마는
"왜 카드 안 주냐?"
하고 묻진 않으셨지만 엄마 아빠를 뵐 때마다 인색한 딸로 생각할까 봐 송구하고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한 일 년 후 아빠가 돌아가셨고 오빠는 결국 지방에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이 집에 살던 조카들도 외갓집으로 다 내려가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으신 거에 충격을 받으시고 다리를 쓰지 못하고 다 내려놓으신 듯하다가 걷지 못하게 되시고 결국은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했다.
그 집에 밀린 월세는 보증금으로 거의 제하고 남은 거라고는 남기고 간 벽지와 장판 새로 깔아야 했고 이사 뒤의 청소와 쓰레기 처리까지 차를 불러 정리하는 것도 다 내 몫이었다.
엄마는 아들 생각해서 한국으로 나오라 했지만 한국이 적응이 안 된 철부지 아들로 인해 아빠의 퇴직금으로 차려준 사업도 지켜내질 못했고 아빠 엄마는 아들 뒷바라지에 한평생 투자만 하시다 가셨다.
'불쌍한 엄마 아빠.. 아들 효도를 못 받고 가셨네..'
3대 독자라고 애지중지 키웠는데 효도를 못 받으신 우리 엄마, 아빠....
형제라고는 하나 있는데 이렇게 되어보니 빌려간 돈도 수천만 원이지만 갚을 능력이 되질 않으니 달라고도 못한다.
외국 어디에 있는지 연락도 없이 떠나는 바람에 병원에 홀로 계신 엄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전에 쓰던 핸드폰 번호로 문자도전화도 다 알렸지만 장례식장엘 오질 않았다. 3일장 치르는 동안 수소문해서 여기저기 알리려 했지만 한국서 쓰던 전화기가 꺼져있고 이후로도 문자 전화 한 통 없었다.
아들하나 있는 게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막상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빈소를 외손주들만 지키게 되었고 그렇게 "엄마, 엄마!" 하며 혼자 효자인 척하더니 어떻게 그 죄를 받으려고 엄마를 아들도 못 보고 가게 만드는지 너무나 힘들게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엄마 카드 가져가고 다시 돌려 드리지 않은 거 죄송해요. 그때는 저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들자식 눈에 못 넣고 가셔서 서운하셨겠지만 이제 아들 걱정 그만하시고 편히 쉬세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아들아 들 하며 편애하시더니 돌아가실 때 엄마 옆에 누가 있던가요?
잘난 아들 때문에 힘든 생 사셨습니다. 이제는 다 잊고 아들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마시고 편히 계세요."
어릴 때 엄마가 나는 못생겼다고, 어리다고 안 데리고 다니고 오빠만 도련님같이 입혀서 챙겼던 생각에 울컥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다 잊었습니다. 달래는 엄마를 자식보다 더 사랑하고 모셨는데 엄마는 병원에 누워서도 오빠만 걱정하고 오빠가 안 보이면 늘 우울해하시고... 늘 그늘이 져있었죠.
엄마에게 오빠는 아픈 손가락이었나 봅니다.
그 일로 여러 번 서운해서 다투기도 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더 안쓰러운 오빠를 걱정하였던 것인데 그때는 서운하기만 했었습니다.
"나도 힘든데 엄마는 오빠만 걱정하고 옆에서 뒷바라지하는 나는 뭐야?"
하고 하며 엄마 맘을 속상하게 했어요.
이제는 내 자식이 커서 내 속을 몰라줄 때 지난 일들이 떠오릅니다
나에게도 아픈 손가락인 큰 딸을 더 염려하자
작은 딸은,
"엄마 이제 언니 걱정 그만해요. 언니도 엄마 아파할까 봐 언니 아픈 거 말도 잘 못하고 엄마걱정만 하고 둘이 너무 남만 걱정하고 표현은 왜 그리 또 못해? 소통이 안돼... 오픈 마인드를 가져보아요!"
딸자식 둘도 이렇게 맘이 다르게 가고 편치 않는데
우리 엄마 아빠도 천방지축 아들 생각하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 가시면서 아들 걱정에 눈도 제대로 못 감았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니 계실 때 오빠랑 잘 지내는 모습 보여드리지 못해서 더 죄송하고 후회가 됩니다. 우애 깊은 남매로 부모님 보시기에 '둘이 남아서 도우며 잘 살겠구나'를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지금은 연락을 하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요.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외국 어디에 있든지 돌아와서 먼저 연락을 해오면 따뜻하게 맞아 주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편히 쉬세요."
못난 딸 못난 아들로 인해 눈 편히 못 감으셨을까 봐 맘이 아픕니다.
그동안 못난 딸로 살아온 이야기들을 부족하나마 적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 더 잘하는 게 효도인데 지금은 후회만 됩니다.
부모님 살아계신 작가님들은 복 받으신 겁니다. 지금이라도 잘해드리시면 정말 저처럼 후회가 되지 않을 거예요.
연재를 어렵게 마쳤습니다. 부모님 생각을 하며 글을 쓰니 울컥해서 중단을 해야 하나도 했지만 약속한 대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