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재촉하는 비가며칠째내린다. 방에 습기가 차려나 싶어 올가을 들어 첨으로 난방보일러를 돌렸다.
그 뜨거운 여름이 가긴 간다. 올여름 내내 시골에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살았는데 서울에 올라오니 벌써 가을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 땀띠가 다 들어갔다.
시골 단독주택이 낮에 받아들이는 태양열은 집안에 있는 병균까지 모두 이글이글 태워 죽일 만큼 파워가 어마어마했다.
그 더위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빠가 간암 투병 하실 마지막 여행이 생각난다.
돌아가시기 3개월 전쯤으로 기억된다.
가시고 싶은 곳에 모시고 가고자 엄마가 아빠한테 묻는다.
"여보 어디 가 보고 싶은데 있어요? "
"........강원도, 원통,...소양강... 많이 변했으려나?"
아빠는 젊어서 강원도 쪽 군부대에 계셔서 그때 시절로 가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아빠 뭐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해 주세요. 잘하는 대로 모시고 갈게요."
아빠는 탕 종류를 좋아하셨는데 그날도 쌀쌀한 날씨 탓이었는지
"꼬리곰탕이 생각나네.. "
드라이브코스로 좋은 선택인 것같아 가까이 사는
이모 두 분이랑 엄마, 아빠랑 강원도 쪽으로 길을 나섰다. 네비를 의지해서 가는 길이라 나도 조금은 조심스러웠지만 아빠가 창밖으로 보시면서 눈만 깜빡거리시는데 옛 추억을 더듬은 것 같이 느껴졌다.
"아빠 생각나세요? 여기 화천, 유치원 다니던 사창리 승리유치원 그 동넨데 길이 많이 달라져서 아스팔트가 깔려서 못 알아보겠네요"
"알지.. 사창리.."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 그만두신다.아마도 내 동생을 집 앞 냇가에서 잃은 기억을 하신 걸까?
엄마도 이모들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을 참 이뻐하셨지. 영악해서 일찍 데려갔다고들 말할 정도였으니까... 아빠가 깊은 산에 묻고 왔다 하셨는데 그날을 기억하시는 걸까...
차를 돌려 인제이정표를 보시고는 엄마가
"원통에서 터미널옆 단칸 셋방에서 네 오빠를 낳았지.."
"여기 터미널은 그대로 그 자리 같네?"
원통 인제를 두루 돌면서 이모들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맞아 그때는 여기 한번 서울서 오려면 하루 종일 걸렸어! 대관령 한계령 눈이 올 땐 어쩌고? 그때는 다니는 게 일이었다."
"우리가 언니네 놀러 갔을 때 마침 부대에 민요가수 김세레나가 위문공연 온다고 저녁에 지프 타고 갔던 일이 생각이 나네 그때가 좋았어요 형부~"
"그랬었나?.. 전엔 위문 공연이 부대에 행사였지....60년대엔 흙길이어서.... 군화 신고 자주 이 길을행군했는데. 지금은도로가 좋아졌네...."
아빠도 엄마 자매들의 수다에 곁들여서 한 말씀하셨다.
소양강 위쪽으로 올라가서 문화홀 쪽에 주차하고 내려서 소양호를 내려다보았다. 떠다니는 유람선 몇 척과 모터보트가 여유 있어 보였다. 확 트인 물을 바라보니 답답한 게 조금은 시원해졌다. 아빠는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서 한동안 물을 바라보셨다.
댐 근처 공원에 전에 없던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길도 자전거 타는 길도 전과 달랐다.
아빠는 회상에 잠기신 듯하며 과거 청년시절을 떠올리시며 이모들과 함께 옛날이야기를 한 말씀씩 나누시기도 하였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섰으나 2시가 넘은 시간이라 이제는 시장기가 돌았다. 아빠가 말씀하신 꼬리곰탕식당에 들어가 한쪽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다행히 손님이 거의 없는 시간이라 자리는 넉넉했다.
얼마쯤 기다리자 꼬리곰탕이 나왔다. 아빠 곰탕 그릇에 있는 고기를 건져 따로 놔드리고 조그맣게 잘라놔 드렸는데 겨우 한 두어 점 드시고 숨이 차하셨다.
'아빠도 얼마나 식사를 하시고 싶었을까?'
아빠가 드신다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못 드시니 속이 상했다. 앉아 있기도 힘들다 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벽에 기대었다가 다시 옆으로 누우셨다. 세 자매가 식사를 마저 하시는 동안 방석을두세 장 깔아서 아빠를 쉬게 해 드렸다.
그무렵부터였나 아빠는 식사를 잘 드시질 못했다. 복수가 차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밥한수저라도 드시게 해 보려고 국물에 밥을 말아 고기 조금 얹어서 드렸는데 씹을 힘조차 없으신지 누워만 계셨다.
아빠가 힘들어하시는 걸 보며 엄마는
"이렇게 못 드시네~ 멀리까지 나오지 말걸 그랬나.. 그냥 포장해서 드리게 해도 될 것을 네가 고생만 했다."
라고 엄마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래도 나오니 좋잖아요! 나도 어릴 때 살았던 강원도에 오니 좋구먼요, 엄마라도 조금이라도 더 드세요."
아빠가 그렇게 힘이 없으실 줄은 몰랐는데 차 타는 게 힘이 부치셨나 보다.
"아빠랑 엄마랑 콧바람 쐬고 전에 살던 곳도 와보고 좋네~~ 이모들도 좋지?"
이모들은 아픈 형부를 모시고 나온 것이 조금은 걸리지만 같이 다닐 기회가 얼마나 더 있을까 싶기도 하고 힘이 없어하는 아빠를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이모들도 처녀 때부터 서울 한동네에서 같이 살고 해서 정이 많이 들은 것이다.
암이란 게 그렇게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아빠가 기운이 없어하시니 더구나 식사도 못 드시니 마음이 더 아팠다. 우리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여 가는 길에 막국수와 닭갈비를 포장을 해서 집에 가서 드시게 하자하고 서울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귀갓길 중간중간에 아빠는 계속 목이 마르다 하시고 물만 자꾸 드셨다.
그날 아빠는 집에 와서도 저녁을 거의 드시지 못했다. 드시고 싶은 의욕은 있으나 입으로씹고 넘길 힘이 없다.
그날이 아빠의 마지막 긴 여행, 마지막외식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쯤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아빠는 하늘공원에서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 서울을 내려다보신 이후로 외출을 못하시고 78세의 연세로 4월 19일에 돌아가셨다.
오늘 점심시간에 친구와 집 근처 곰탕을 마주 대하고 앉았는데 그날의 아빠 모습이 어른거려 곰탕 앞에서 눈물이 와락 나왔다.
아빠가 그렇게 들고 싶어 하시던 그 마지막 식사, 꼬리곰탕을 내가 8년 만에 마주하고 앉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거리에서 중절모에 지팡이 짚은 어르신의 뒷모습이라도 보면 아빠가 아닐까 하며 잦은걸음으로 뛰어가 옆을 지나가 보기도 했다.
'아빠는 진짜로 돌아가셨지... 꿈이 아니지? '
꿈에서라도 아빠가 아픈 모습으로라도 나타나면 그렇게 종일 맘이 쓰이고 꿈에 건강한 얼굴로 엄마랑 계신 꿈을 꾸면 엄마 아빠가 잘 계시는구나 하며 나도 안심을 하고 하던 때가 있었다. 몇 년은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세월이 흘러 꿈에 자주는 못 뵙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있다.
아빠를 만나러 갈 때마다 아빠는
"오느라 수고했다."
라는 한두 마디로 아빠를 만나러 오는 여정이 힘들었음을 알아주시면서 안아주셨던 기억이다.
그때 피곤함이 싹 가셨다.
시집을 간 후에도 아빠는 그렇게 말씀대신 안아주셨다.
아빠는 살이 찐 체형이 아니어서 뼈가 닿을 정도로 앙상한 품이었지만 아빠의 체온과 땀냄새가 그렇게 싫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달래야 "하며 들어오실 것 같은 아빠~
지금도 후회스러운 것은 아빠가 한국에 엄마 따라 나오셨을 때 그때는 잘 걸으시고 나들이도 다니실 때였는데 어디라도 자주 모시고 다니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는 게 바쁘고 아이들 유학 뒷바라지를 하느라 부모님께 더 신경을 못썼다. 그게 너무 아쉽고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