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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Sep 07. 2024

오마담! 진짜 이러기예요?

밤 알 두 톨에 와락 눈물이!

"난 몰라

자꾸 잊어버려

생각이 안 나

이제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살았어.."


라고만 말씀하시는 작은 엄니~



"엄니~ 옛날 일 생각 안나도 되고 오늘이 며칠인지 몰라도 돼요!"


90세까지 다른 큰 병 없이 무릎인공관절, 허리협착증 정도만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신 거죠~ 앞으로도 식사 잘하시고 백수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촌언니들이 와서 이제 시골을 떠난다. 그동안 엄니 곁에서 100일을 살았다.

내 생에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

달래의 시골살이는 60 평생을 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연단의 시간이다.

물론 피붙이는 아니지만 엄니의 옆을 잠시 지켜드렸고 미운 정 고운 정 들었고 딸같이 생각해 주신 엄니께 감사를 드린다.

가끔 정신이 나가셔서 험한 말로 퍼부을 때 상처가 되어 가슴이 아팠지

막상 시골 살이를 접으려 하니 엄니가 걸리긴 한다.



짐을 싸고 보니 트렁크 두세 개 정도인데 마음이 트렁크 무게만큼 무거웠다.

사촌언니가 와서 작은 엄니 상황을 보니 혼자 계시다가는 더 큰일이 생길 것 같아 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치매가 무섭긴 하다.

돌아가신 엄마도 병원에 들어가셔서 1년 만에 돌아가셨던 기억이 떠올라 착잡해진다.


엄니는 식사를 세끼를 못 드신다. 아침에 단백질 한 컵 두유에 타서 드시고 낮엔 간단히 죽 같은 걸로 드신다.

저녁에 생선이나 고기반찬에 겉절이 같은 걸로 차려드리면 몇 수저 드시고 배부르다 하신다. 어떤 날은 이것조차도 밥을 왜 자꾸 먹으라고 하냐고 안 드실 때도 있다. 엄니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짐을 느낀다.


"나이 들면 밥맛도 없어 젊을 때는 김치 대가리 쓱싹 잘라서 쭉쭉 찢어 먹어도 그렇게 밥맛이 좋았는데.. 이제는 입이 써... 고기를 줘도 못 먹어! "

라고 손사래를 치고 상을 물리라 하며 딸이나 많이 묵으라고 하신다.

엄니가 식사를 잘 못하시니 나도 밥맛이 없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속이 상한다. 살이 2킬로나 빠졌다.

더위에 땀을 흘려서인지 밥을 제때 맛있게 못 먹어서인지 도통 모르겠다.


"엄니 저 이제 가요. 식사 잘하시고 건강하셔야 해요."

하니

"어디가? 갔다가 언 지와?"

"엄니 보고 싶을 때 또 올게요. 3시간이면 금방 날아와요.

상추밭 나가서 풀매고 그러심 안 돼요 이 위에 클라요."

"풀이 욕혀~ 그러고서 무신 고추랑 상추 따먹을라고 왔냐고!"

작은 엄니는 혼잣말로 되뇌신다.


휠체어에서 내려서 지팡이 짚고 열 발자국 걸으면 텃밭이 나오는데 거기서 엄니는 포복으로 기어 밭까지 가셔서 세상 다 사신 것처럼 퍼질러 앉아서 부추밭, 파밭, 고추, 가지 밭을 내 종아리만큼 수북이 올라온 잡풀들을 매곤 하신다.





못 나가게 하려고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있으면 답답하고 덥다고 자꾸 열어 놓으라고 성화를 하신다.

작은 엄니의 한 고집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엄니 이제 풀이 나건 장마가 지건 그런 걱정은 마시고 엄마 건강생각해서 식사 잘하시고 재미나게 사는 것만 생각해요.."

엄니 손을 꼭 잡고 몇 번을 말씀을 드렸다. 지금은 알았어 하지만 아마도 10분 지나면 밭으로 나갈 틈을 노리시겠지....


보따리를 싸고 보니 내가 엄니를 놓고 떠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닌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어차피 엄니를 내가 평생 모실 수 없으니 내 갈 길을 가는 게 맞다는 결심이 생겼다.


한여름 엄니의 에어컨 전기세에 선풍기 켠다고 밤에 불 끄라고! 초저녁인데 왜 이직도 안 자냐고 하는 이런저런 옛날 사람의 절약정신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던 건 사실이다. 더구나 앞마당에 시도 때도 없이 지나다니는 고양이와 쥐들의 행진으로 눈에 불을 켜고 내 집을 사수할 목적으로 둥이는 짖어대니 그럴 때마다 엄니의 하이소프라노장을 넘어 이웃 오마담 집에까지 들린다.

"시끄럿!! 저 개 xx 내가 쥐약 먹여 죽여버린다 시끄러서 못살겠네!"

라며 악담을 퍼붓는다.

그 저주 섞인 말들에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며

"저렇게 영리한 놈은 첨 본다, 똘망똘망 금박하게 생겼다.. 내 생전 저렇게 주인을 따르는 놈은 보들 못했다."

하시며 둥이를 이쁘다 하는 엄니를 탓할 수도 없다.


치매가 문제이다.


"엄니랑 지냈던 시간이 오래 기억이 남을 것 같아요 어릴 때 저한테 잘해주신 거 기억합니다. 저한테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고아되었을 때 의지하고 싶었던 엄마입니다."라고 손을 꼭 잡고 건강을 빌어드렸다.


엄니랑 식혜도 만들고 공주에 수국도 보러 가고  광복절날 계곡 가서 닭죽도 먹고 물놀이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남을 것 같다고도 말씀드렸다.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둥이와 산책하며 마주했던 꽃과 나무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행운을 준다는 네 잎 클로버도 만났었지!

앞으로 전개될 앞 날에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본다.





가방을 싸고 둥이의 짐 중에 시골에 와서 만들었던 계단과 강아지쿠션집이 눈에 띈다. 오마담네 두 마리 강아지가 생각났다. 인사도 할 겸 들고 둥이랑 집을 나섰다.

오마담이 활짝 이를 들어내며 반가이 맞아 주신다. 내가 떠나는 줄도 모르시고...


"아가~ 어서 와 그게 뭐여?"

둥이는 어느새 오마담하고 정이 들었는지 벌써 목줄을 길게 늘어뜨리니 오마담네 마루에 뛰어올라 냄새를 맡고 있다.

"엄니 저 이제 서울가요. 그동안 딸처럼 대해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이거 강아지 집하고 계단인데 침대 옆에 두시고 쓰고 겨울에 밖에서 지내는 이름 없는 백구 깔아주세요."

엄니는 고맙다고 몇 번을 말씀하시며

"이제 가면 또 언지와? 딸네로 가는 거야?"

"네 서울에 집이 있어요 엄니 생각나면 또 올게요."


어쩌면 작은 엄니는 같이 사는 사람이라 티격태격 감정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치매끼가 조금 덜한 오마담하고는 둥이도 이뻐해 주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셔서 더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인사를 드리고 집에 와서 트렁크를 싣고 있는데 저만치서 오마담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털레털레 걸어오신다.

"아직 안 갔지? 이거 가다가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동안 올 때마다 냉커피에 부추전에 잘 챙겨줘서 고마웠어. 딸이 간다고 하니 많이 섭섭하네."

하시며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를 내 손에 살짝 쥐어주신다.

"엄니 왜 이러세요 제가 드려야지 엄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

펼쳐보니 2만 원이다.

나는 눈물이 왈칵 났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이기도 하고 오마담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오래전 애들 키울 때 친정에 갔다가 서울에 올라갈 때면 엄마도 저렇게 만 원짜리 몇 장을 내 손에 쥐어주며

 "애들 키우려면 돈이 아쉽지~" 하시며 내 손에 어주시기도 하였는데 나는 그 돈은 뿌리치며 결사적으로 받질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인가 나는 세뱃돈을 받지 않았다.

엄마도 내가 올 때마다 음식할라 애들 입히고 뭐라도 사주고 하느라 돈을 쓰는데 내가 드리고 못 가서 늘 죄송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오마담의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눈물이 나왔다.

"울지 마, 나도 정이 들었어. 전화번호 입력해 줘~ 생각나면 보고플 때 전화라도 하게." 하시며 밤톨 두 알을 내 손바닥에 놓아주신다.

85세 된 지금 치매가 오락가락하는 분이 엄마같이 말씀해 주시니 내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엄니 가서 전화드릴게요. 더 잘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내 차가 마당에서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드는 두 치매 노인들이 시야에 뿌옇게 보였다.

창문을 열어 나도 오른손을 흔들어 드렸다.

멀리 사촌들 내외도 보였다.

한솥밥 먹고살던 백일 간의 시골살이가 여기서 일단락된다.


치매 어르신들께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게 걸리고 한순간에 버럭 대구를 했던 게 떠올라 부끄러웠다.


'작은 엄니, 오마담~ 쓰리고 피박 할 때가  좋았네요!'

담에 뵈러 올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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