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1999년 퇴직하시고 엄마와 함께 오빠가 사업의 기반을 잡고 있던방콕, 외아들네로 떠나셨다. 이혼하고 딸아이들과 사는 혼자된 딸을 두고 가시는 마음도 편치 않으셨겠지만 당신의 간암 치료 요양차 떠나셨다.
이후 10여 년 만에2011년 부모님 중 엄마만 귀국하셨다.
"엄마가 심장이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지신단다."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오빠의 말에 너무 놀라 얼른 한국으로 나오시게 하여 검사를 받았다.
엄마가 들어오시면서 아빠가 외로움을 타셨고 엄마는 한국에 나와 한 집에 살면서 아빠를 그리워하셨다.
엄마는 대학병원에서 심장조영술 결과 오른쪽 손목으로 좁아진 혈관에 스텐트 시술을 하게 되어 입원을 했고 달래는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병원으로 퇴근을 하여 엄마 병상을 지켜야 했다.
간병인을 둘 형편이 못되어 낮엔 병실의 간병인들이 엄마를 도와주셨고 6시에 퇴근과 동시에 병원으로 가서저녁식사 식판을 받으러 뛰어야만 했다. 엄마의 식판만 내가 받으러 갈 때까지 냉장고보다 더 큰 은색 배식통에 남아 있었다. 이럴 땐 형제자매가 여럿인 사람이 부러웠다.
어릴 때부터 달래는 혼자였다. 오빠는 주로 밖으로만 돌았다.
여리디 여린 엄마의 혈관에 3개의 스텐트를 넣었고 더 힘이 없어진 엄마는 혼자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셨다. 심장이 조금씩 정상으로 회복이 될 때까지는 누군가 옆에 있어야 했고 소변줄을 달아야 했다.
엄마는 40대부터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계셨다.
3주 후,
소변줄도 떼고 한걸음 씩 걸음이라도 걷게 되자 집으로 모셨는데 아빠를 외국에 두고 온 게 자꾸 걸리는지 매일 통화를 하면서 아빠가 한국에 나오셨으면 하면서 잠을 못 이루셨다. 그때는 아빠를 오빠가 모시고 있었다. 엄마아빠는 이제껏 떨어져 살지 않으셨고 결국은 한 달 만에 아빠도 나오시게 하여 두 분만 사실 수 있게 방 두 칸짜리 주공아파트를 월세로 얻어 드렸다. 아빠도 엄마를 만나니 좋아하셨고 엄마도 혈색이 돌았다.
아빠도 한국에 10년 만에 나오시니 못 만난 친지들이랑 친구들도 만나러 다니시고 몇 년은 그렇게 한국생활을 즐기셨다.
이미 아빠는 간암진단을 받으신 지 10년이 넘은 시기였다.
아빠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시고 간암 진단 후 10여 년을 따뜻한 나라에서 요양하며 더 사셨는데 한국에 나오니 적응이 안되시는지 감기에도 걸리고 기력이 없으시다. 아마도 간암이라는 지병을 앓고 계셔서 무리를 하시거나 하면 금세 피로를 느끼셨다. 또한 사계절 따뜻한 나라와는 기온차이 등 모든 게 달랐다. 그리고 아픈 엄마를 아빠가 케어하시며 두 분이서 장도 봐다가 식사준비를 아빠가 거의 다 하셨다. 원래 아빠는 가정적인 분이셨다.
한국에 나온 지 3,4년이 지난 2015년 즈음에 하루하루가 다르게 아빠의 건강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배가 이유 없이 풍선처럼 불러오기 시작했고 딱히 많이 드시지도 않는데 배가 딱딱해졌다.
"병원에 가봐야겠다. "
엄마는 아빠의 병을 알고 계시기에 혹시라도 아빠가 당신의 병을 알게 되실까 봐 걱정스러우신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씀하셨다.
걸음을 떼기도 힘겨워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소화기 내과 병원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아빠가 말씀하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피로가 갑자기 심해지고.. 종합검사를 받고 싶다."
나는 뜨끔했다.
'검사를 하면 당신이 암인 줄 아실 텐데 그러면 더 낙심하실 텐데...'
하고 말이다.
"아빠, 의사 선생님한테 여쭤보고 하기로 해요."
"내가 강단이 있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고 입맛이 없는지..."
"한국날씨가 적응이 안 되나 봐요, 아빠.."
밖에는 늦은 꽃샘추위가 막바지에 있었고 벚꽃이 피려고 할 때였다.
아빠 이름을 불러 외래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이 아빠한테 물으셨다.
"선생님, 어디가 불편하시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입맛도 없고 배가 딴딴해요."
아빤 기력 없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말씀을 하신다.
선생님이 아빠를 진료실 베드에 눕히고 배를 여기저기 눌러 살피시더니
"배에 물이 찼어요. 약을 드릴 테니 일주일 드셔보시면 물이 조금씩 빠질 겁니다. 효과를 보면 좋고 아니면 다시 나오시든지 하세요. 그리고 드시고 싶은 거 잘 챙겨 드시고요. 어르신.."
아빠는 약을 먹고 다시 나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안도를 하신 듯 대기실에서 처방전이 나오길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간호사님께 잠시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잠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혹시나 아빠가 들을 까봐 낮은 목소리로
"선생님, 아빠가 15년 전에 간암진단을 받으셨어요. 아빠는 병을 모르시고요. 가족만 알고 있어요. 외국에서 요양하시다가 이제 들어오셨는데.... 상태가 어느 정도인 거죠? "
"차트를 보고 알았어요. 이제 간기능이 제대로 되질 않고 전반적으로 건강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하신 겁니다. 곧 통증이 오고 더 심해질 건데 이뇨제와 알부민을 처방했으니 복수를 빼면서 지켜보시는 방법밖에 없어요. 연세가 드셔서 수술은 어렵습니다. 그때 진단받으셨을 때도 수술이 어렵다 하셨죠?
"네. 암 부위가 한가운데 있어서 레이저 시술만 두 번 했어요.""
그리고 조용히 다시 덧붙이신다.
"저 정도 복수가 찬 거면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보시면 됩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걸로 조금씩이라도 해서 드시게 하시고 보호자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라고 하신다.
'이제 때가 온 거구나 아빠가 돌아가시려나보다.'
다리가 풀려 잠시 현기증이 났다. 진찰실에서 다시 얼굴 표정을 고쳐먹으며 아빠에게로 갔다.
"약을 잘 드시고 식사도 잘하시면 좋아질 거래요. 아빠. 일주일 뒤에 또 와요."
더 이상 아빠는 종합검진받자는 말씀은 안 하셨다.
아빠 연세 78세. 100세 시대에 이 연세로 돌아가신다면 너무나 아쉬운 나이다.
간이 더 이상 기능을 못하니 복수가 찬다. 배가 개구리배였다가 지금은 임신 5,6개월 정도처럼 부풀었고 장기를 누르니 식사도 못하시고 입맛도 없으시다고 하시고 옆으로 누워계시면서 약으로 복수를 조금씩 빼야 한다.
전복을 사다가 입맛을 회복하시려나 싶어 죽을 끓여드렸는데 몇 수저 뜨시는가 하다가 못 드시겠다 하신다
"아빠~ 조금이라도 드셔야 다시 일어나 한강에도 나가고 하죠, 안 드시면 못 일어나요 아빠~~"
가족들의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는 식사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빠한테 아빠의 병을 말씀드리고 남은 생을 정리할 시간을 드리는 게 맞는 건지 아님 이대로 모르시게 하고 보내드리는 게 맞는지 가족들과 상의를 했는데(아빠의 건강악화로 오빠도 아빠 곁을 귀국해서 지키고 있었다.)
"아시면 더 낙심하실 거고 지금도 힘들어하는데 안 하는 게 맞다."
라고 엄마가 의연히 말씀을 하신다. 엄마도 아빠를 먼저 보낼 준비를 담담히 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아빠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침대에 거의 누워계셨고 눈은 풀리셔서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실 정도로 쇠약해지시며 병마와 싸우고 계셨다.
밖에는 날씨가 풀려 벚꽃이 한창이었다.
"아빠, 엄마 벚꽃 구경 갈까요? "
"나도 그렇고 아빠도 못 걸으시는데 어떻게 가니?"
엄마는 가고는 싶은데 엄마도 아빠를 의지하고 걸었던 때라 아빠가 누워계시니 꼼짝도 못 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차에서 내리시지 말고 밖에 구경만 하시면 어때요?"
아빠가 조금씩 드실 물과 약간의 과일을 챙기고 엄마아빠의 모자와 선글라스도 챙기고 부리나케 준비를 마쳤다.
'어쩌면 내년 벚꽃을 못 보실 수도 있겠구나.. 아빠가'
먼저 아빠는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차에다 모셔다 놓고 엄마는 휠체어에 태우고 차에다 뒷좌석에 앉히고 셋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두 분은 비록 차 안이지만 하얗게 덮인 서울을 눈에 담기 시작하셨다.
여의도 쪽으로 접어들으니 길거리를 통제하고 양쪽으로 구경 나온 사람들로 사람구경인지 꽃구경인지 모를 정도였다. 길은 막혀도 오며 가며 꽃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앞 차를 따라 행진했다.
아빠의 눈에 가득 담고 계시기를 바라며 말이다.
"아빠 꽃 보여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돌아서 행주산성 쪽으로 갔다가 하늘공원에 가서 코끼리 열차를 타고 올라가 봅시다!"
아빠는 힘이 없으시지만 밖을 구경하시며 그래도 엄마를 부축하시고 힘을 써주셨다.
하늘 공원까지 코끼리차로 올라가서 상암동과 한강과 시내를 내려다보셨다. 개나리도 피고 있고 벚꽃은 이제 피기 시작하였다. 아빠엄마는 힘겨워하셨지만 데크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기도 하시고 물로 목을 축이기도 하셨다.
"아빠가 앉아있기 힘들다 하신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이게 아빠의 마지막 벚꽃 나들이가 되었다.
아빠는 대학 땐 보이스카웃 단장에 총학생회장까지 하시고 군에 계실 때는 군부대를 호령하는 헌병 대대장까지 하셨던 씩씩한 청년이었다.
군생활 18년 예편 후 교직에 20년 몸을 담으셨고 퇴직 후 오빠가 살던 방콕으로 가셔서 친손주들과 10여 년 지내시며 한식당을 하는 오빠를 옆에서 돕고 골프도 치고 리조트에 다니시며 요양을 하셨다. 천운인 건 아빠의 암진단 이후로 16개월도 못 사실 줄 알았는데 15년의 생을 더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방콕에 계실 때 엄마가 아침에 눈을 뜨면 케일에 요구르트를 넣고 매일 갈아서 챙기셨고 간에 좋은 건 다 알아보고 상황버섯도 구해다가 매일 드시게 했다. 이만큼 사신 것도 엄마의 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들만 알고 있는 아빠의 암세포가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간이 제 할 일을 못하니 복수가 찬다.
아빠~~~!
아빠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종합검진을 못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빠가 더 사실 수만 있다면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후 아빠는 죽도 못 드시게 되었고 바짝 말라 유치원생의 몸처럼 작고 뼈만 남아 침대 한편에 공처럼 웅크리고 계셨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에 가슴이 찢어졌다. 이후로 병원을 두 어번 가서 영양제도 맞았지만 가족이 아빠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인간의 무기력함을 깨달았다.
엄마네 집하고
5분 거리에 살던 나에게 이것저것을 사 오게 하시던 엄마는
어느 봄밤 9시,
"아빠가 막걸리를 시원하게 드시고 싶다 하시네~"
하셔서 죽도 안 드시고 입에 뭘 안 넘기셔서 걱정하는 터라 그거라도 드시면 기운을 좀 차리시려나 해서 막걸리 3병을 사서 딸아이와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빠 저 왔어요."
"왔... 냐 따알~ 어서 와..."
개미소리만큼 입만 살짝 벌리시며 눈으로 인사를 하신다.
아빠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수저로 입을 촉촉이 적셔드렸다. 막걸리를 한 병 따서 맑은 물을 수저로 두 어 번 흘려 삼키셨고 그것도 힘이 없어 더 이상 넘기질 못했다. 사다 드리면 일어나 앉아서 꿀꺽꿀꺽 드시는 상상을 하며 달려왔는데 평상시처럼 한 잔 주욱 들이켜실 줄 알았는데 넘기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하셨다.
그게 아빠의 생에서 마지막 음식이었음을 아무도 그때까지는 몰랐다.
아빠는 눈만 깜빡이고 말씀도 못하셨다.
그래도 딸내미가 사 왔다고 두어 수저쯤 받아 드시고 편안하게 눈을 떠었다 감았다를 하시다가 주무시는 걸 보고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눈을 잠깐 붙였을까? 핸드폰 벨이 울린다.
새벽 5시.
이 시간에 벨이 울릴 일이 없는데 불안함에 바짝 긴장이 된다.
"아빠 돌아가셨다." 오빠다. 목소리가 담담하다.
"지금 갈게."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엄마도 이미 환자였기에 더 충격을 받으시지 않게 아빠를 편안하게 보내드려야겠다는 마음만 있었다.
주섬주섬 카드와 핸드폰을 챙기고 장례식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서였는지 더 냉정하고 차분해졌다.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으로 장례식이란 걸 준비하여야 했다.
오빠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와서 한국 물정을 나보다 더 몰랐다.
다행히 상조를 준비해 둔 것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고 아빠를 장례식장 영안실로 모시게 되었다. 친지들에게 연락을 드렸고 3일장으로 간소하게 모셨다.
아빠는 주무시다가 새벽에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전날 오빠가 목욕도 시켜드렸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아빠는 교회를 다니셨고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늘나라로 영이 편안히 가셨으리라 나는 믿었다.
엄마는 장례식장에 오시지 못했다. 시술 후 걷는 게 힘이 더 드셔서 걸을 힘도 없으셨고 집에서 쉬어야 할 몸이었다. 이모들이 엄마를 챙기고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홀로 된 엄마를 편안히 지내 실 수 있게 꼭 붙어 있었다. 오빠는 사업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나에게 엄마를 맡기고...
두 딸아이도 할머니께 매일 찾아뵈며 혼자된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드렸다.
짝을 잃어버린 엄마는 저녁에 해가지고 퇴근 무렵이 되면
"여보, 나왔어." 하시며 현관문을 들어오실 것 같다며 자꾸 환영이 보인다 하셨다.
엄마도 이미 정상이 아니셨다. 걸음을 걸으려면 몇 발자국 떼고 쉬었다가 걷고 또 걷고... 이제 산책은 하시질 않는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다 내려놓으신 것 같다.
부부라는 게 그런가 보다. 50년 넘게 산 반쪽을 보낸 엄마를 보니 세상을 다 잃으신 모습이다. 엄마의 마음이 더 허하지 않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사는 게 쉽지 않다.
냉장고에서 엄마한테 뭐라도 드릴 게 있나 열어보니 냉동실에는 아빠가 홍시를 좋아하셔서 겨울에 사다가 얼려놓은 게 한쪽 켠에 하얗게 있고 막걸리 세 병 중에 한 병만 열려있는 상태로 두 병은 그 자리에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드시고 싶어서 막걸리를 사다 달라고 하셨을 텐데 그것조차 몇 모금 드시지도 못하고 생을 달리하신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