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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r 14. 2023

 앙(仰) 이목구심서 3

만설(晚雪)ㅡ입춘 지나 눈 오다

간밤에 세상이 설국으로 변했다.
지난 자정 무렵부터 눈이 내렸으므로 네댓 시간 만에 이룬 혁명이다.
날이 밝아오면서 그 전모가 드러난다.
길도, 마을도, 나무도, 산도 흰 눈에 사로잡혀 꼼짝 못 하고 숨죽이고 있다.
세상을 점령한 눈은 기쁨에 취해 백색의 환호성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의 승리는 눈부시다.

하나의 개체로써 눈의 존재는 너무나 약하고 어설프다.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기 쉽다.
그러나 공동체로서의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힘이 세다.
길을 막고 바람을 몰아 세상을 덮어버린다.
천하를 호령한다.

그러나 눈은 어두운 그림자조차 외면 않고 찾아가 덮어준다. 부정과 부패로 곪아가는 오물에도 다가가 냄새를 맡으며 오히려 반짝반짝 빛나도록 안아준다.
그래서 눈은 시민들에게 환대받는 점령군이다.
그들의 입성과 주둔은 마을을 축제의 장으로 만든다.
백색의 환희, 순백의 향연이다.
깨끗함은 모두의 본성을 일으켜 세워 춤추게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제일 먼저 뛰쳐나온다.
나에게도 눈은 동심이고 추억이고 고향이다.
눈은 부모요, 누이이며, 형제이다.
눈은 학교요, 운동장이요, 첫사랑이다.


시멘트 마당이 눈으로 빽빽하다.
빗자루로 눈을 쓸어 길을 낸다.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길이 등 뒤에서 꿈틀거린다.
느티나무 가지마다 줄줄이 눈이 앉아있다.
그러나 빨랫줄엔 눈이 없다.
눈 한 송이 받아줄 넉넉함이 없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제설의 달인은 한낮의 햇볕이다.

마을의 길들이 검은 등짝을 전부 내어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
눈은 어느새 산속으로 물러나 비탈에 진을 쳤고
마을엔 패잔병만이 남아, 그들마저 투항을 도모하고 있다.
하루 해가 기울듯 혁명 정부가 허물어지고 있다.


                                                           2023. 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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